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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Feb 13. 2021

엄마가 "설 같지가 않네"라고 말했다.

설 연휴 전날이면, 아버지는 10시 이전부터 아버지는 자라고 성화였다.

2019년의 차례상


엄마가 "설 명절 같지가 않네"라고 말했다.


이번 설에는, 코로나 19로 엄마가 큰집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나에게는 결혼 후 첫명절이었다. 남편과 나는 시댁과 친정을 다녀왔다. 양가 모두 대중교통으로 1시간 내에 갈 수 있는 곳이다. 가까운 두 집을 가는게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다. 양가에 가서 남편과 나는 세배를 하고 용돈을 드리고 복돈을 받았다. 차려주신 갈비, 만두, 잡채 등을 맛있게 먹었다. 부모님께서는 너희들은 손님이니 쉬라고 하셔서 설거지도 안 했다. 정말 손하나 까딱하지 않은 명절이었다. 코로나 19로 딱히 갈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공원만 산책을 갔다. 윷놀이를 하고 트로트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봤다. 편하고 가벼운 설이었다. 엄마는 아무래도 설 명절 같지 않다고 했다. 어린 시절 설날의 기억을 돌아보면 나 또한 그랬다.


설 연휴 전날이면, 아버지는 밤 10시 전부터 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명절 전날 10시엔 티비에서 재밌는게 많이 했지만 잘 수밖에 없었다. 새벽 기상을 위해서다. 어린 동생과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며 눈을 감는다. 새벽 3시, 부모님의 손길에 잠이 깬다. 친가 외가, 큰집이 있는 전라북도 고창은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이다. 서울에서 고창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우리는 새벽에 잠을 깬다. 새벽을 택해 출발해야 차가 덜 막힌다. 부모님은 칭얼거리는 남동생과 나를 달래고 깨워 씻긴다. 커다란 가방과 짐과 가족이 차에 실린다.


차를 탄 후 나는 다시 잠든다. 눈을 뜨면 까만 도로에 자동차의 빨간 눈들만 보인다. 맛집에 줄을 선 사람들처럼 눈을 붉힌 차들이 일렬로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조금씩 전진한다. 백미러로 보이는 아빠의 눈도 자동차의 후미등처럼 붉다. 엄마는 졸려오는 아빠의 목을 주무른다. 개미의 행렬 같은 도로 상황을 보다가 나는 다시 잠든다.


고속도로에서 기어가다가, 국도로 빠져나와서 조금 달리고, 화장실을 가려고 멈추고, 그러다 보면, 아침이 밝아온다. 빠르면 4시간 오래가면 8시간까지 걸리는 여정, 우리는 고창에 도착한다. 짐을 내려놓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세배를 드린다. 밥을 먹고 왔다고 말해도 할머니는 다시 식사를 차린다. 식후에는 잔뜩 온도를 올려놓은 전기장판 위에서 엄마 아빠는 여정에 지친 몸을 녹일겸 다시 잠든다. 


일어나면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큰 집으로 향한다. 큰아빠와 큰엄마께 세배를 드리고 나면, 부엌에 자리가 펼쳐진다. 까맣고 커다란 사각의 팬 위에 기름을 두르고 동그랑땡 반죽을 숟가락으로 한 스푼 올린다. 올리고 뒤집고 뒤집개로 눌러주는 일을 여러번 반복한다. 손바닥 정도 되는 동그랑땡이 수십개 만들어진다. 양반 다리로 전을 몇 개씩 부치다 보면 다리가 저리다. 나는 일어나서 제자리 걷기를 하기도 하고 엄지발가락을 뒤로 젖히며 저린 다리를 풀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집요했던 나는 반죽을 다 전으로 바꿔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다. 지금 하라고 하면 “돈 주고 사.”라고 할 텐데 어릴 때는 그게 미션 같았다. 반죽통을 다 비우고 나면 뭐가 좋다고 박수를 짝짝 쳤다. 엄마도 지친 눈으로 함께 박수를 쳤다. 


동그랑땡, 동태전, 호박전, 고추전, 두부전, 햄 전, 육전, 산적 꼬지. 전집에 가서 모둠전을 시키면 나올법한 풍성한 구성으로 각종 전을 부처 낸다. 그 외 고사리, 미역국, 수육, 생선구이 등 여러 가지 차례음식을 준비하면 설날 전날이 지나간다. 기름기 냄새와 음식 내음이 가득한 하루가 지나간다. 엄마와 나, 큰엄마, 큰엄마의 며느리가(이분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냥 ‘언니’라고 한다.) 음식을 하는 동안 아빠와 고모부는 낚시를 가신다. 


내일은 설, 오늘도 일찍 자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면 차례상이 차려져 있다. 나는 차린 기억이 없는데 큰엄마가 차리셨을 거다. 엄마는 “형님 죄송해요~ 못 깼네요.”라고 한다. 새벽 6시에 일어나도 시골에서는 늦다. 상을 차려두면 큰아빠는 상의 위치를 봐주신다. 한자가 쓰여있는 지방과, 상 뒤의 알록달록한 병풍이 보인다. 내게는 이 광경이 늘 무섭고 낯설다. 정말 귀신이 올 것 같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부엌에서 대기를 하면, 이름도 직급도 모를 친척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절을 한다. 그들이 절을 마치면 숟가락과 떡국을 차려준다. 아빠와 모르는 남자들은 다시 다른 집으로 가서 이 일을 반복한다.


나와 동생도 아빠를 따라나서 집집마다 세배를 드린다. 누구신지,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지만 우선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한다. 대학생이 되는 새해에는 새배 돈을 꽤 많이 받았다. 왜 이렇게 모르는 친척이 많은 지 몰랐는데 나중에야 이곳이 집성촌임을 알게 되었다. 같은 성씨의 친척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큰 아버지 댁에서도 밥을 거하게 먹고, 친척집도 돌면서 밥을 먹다 보면 설 연휴는 계속 배가 불러 있다.


차례를 드리고 나면, 아빠와 엄마의 <외갓집에 언제 갈 것인가> 눈치게임이 시작된다. 아빠는 고모들이 오니까 조금만 기다렸다가 보고 가자고도 말하고, 여러 친척집을 돌고 와 피곤하다며 잠깐 주무시기도 했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할머니의 손이 닿지 않는 선반을 닦으며 어지러운 집을 치우기도 했다. 샴푸나 비누들을 사다가 시골 화장실의 빈 공간도 채웠다. 나는 친척들이 오면 그저 좋았다. 비슷한 나이의 사촌동생들과 원카드나 미리 준비해온 부루마블을 했다. 저녁을 먹을 때쯤 외갓집에 갔다. 외갓집에서는 할머니와 엄마가 저녁 식탁 위에서 복분자를 한 잔씩 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곰팡이, 한지의 냄새가 어우러진 시골 내음, 기름기가 가득한 음식들, 파마머리를 한 큰엄마와 우리 할머니, 비포장도로와 사방에 널린 풀들, 슈퍼를 가려고 나와도 20분 이상 걸어 가야 하는 시골, 엄마와 아빠의 눈치싸움, 도로에 갇혀 보내는 시간들, 나의 명절은 이런 기억과 추억들로 채워져 있다.


“설 같지가 않다.”라는 나의 말에 우리 시어머님은 “그래도 그런 추억이 있어서 즐겁고 좋은 거야.”라고 하셨다.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추억을 가진 것은 맞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이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이고, 고생스러운 기억도 추억이 된다는 게 신기하다. 어린시절에는 그런줄도 몰랐다. 이번 설에는 큰엄마도 전을 부치지 않으셨다고 한다. 엄마와 나는 “참 잘하셨다.”라고 했다. 코로나 19로 조금 달라진 설, 동그랑땡 없이도 편안하고 다정함이 가득한 설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기억하던 명절 같지 않아서 좋았다. 나 외에도 많은 이들이 평소보다 가벼운 설을 보냈을 것이다. 이번 설이 지나가면 앞으로는 좀 더 편안한 설이 문화로 자리잡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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