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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Jul 15. 2020

7/14

15. 거의 10  우리 집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건설사 직원들이 찾아왔다. 삼성, 대림, 동일 등등 그들은 엄마 아빠름 사모님, 사장님이라 불렀다. 엄마 아빠는 꿈에 부풀었다. 나중에  것은 우리말고 동네의 다른 사람들에겐 재개발이 꿈이 아니었다는 거다. 수중에 1억이 없고, 대출이 힘들고, 몸이 노쇄하거나 일을   없는 이들에게는  곳이 없었다.

부모님의 꿈을 깨버린 것은 새로운 “시장놈이었다.  시장놈은 재개발을 성사를 위한 “주민투표찬성비율을 높여 부자의 꿈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렸다. 우리 주민의 절반 이상이 재개발을 원하지 않아서다.  시장놈이  오래 갔다. 우리 동네도  시장놈의 정책 때문인지 빌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모님은 그를 경제를 정체시킨다고 비난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그를 점점  싫어하게 되었다. 대학교  배운 “시민 참여 정치 사람이 실현하려는 노력이라도 하능 것처럼 느껴져서. 스타성은 떨어져도 도시에 공기처럼 스며드는 시장에게 존경을 느끼기도 했다.

시민인 동시에  몸은 여성이다.  몸에 달하는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롭기란 어렵고,  시선과 시도들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존경했던 그에게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존경심이 없었다면 이정도 배신감이 들지 않았을 거다. 나는 이번에도 공덕에 대한 존경을 개인의 덕성과 동일시하는 실수를 범했다. 피해자는 이미 증거제출과 함께 고소장을 제출했다.  경찰 고소사실이 어떠한 경로로 그의 귀에 흘러 들어갔고, 그의 선택은 회피였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던 그가  선택이 무엇을 초래할  몰랐을까. 충분히  만한 그였다. 어떤 사람들의 말마따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선택한 거라면,  또한 마지막까지 자신만은 고귀함을 지키겠다는 다분히 이기적이고 비겁한 핑계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든 화가 치민다.

희대의 살인마도 죽고 나면 장례에 예를 치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조문은 하지 않았으나 죽음 뒤에 최소한의 예를 차려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황망한 죽음이라 슬프다. 하지만  이상은 없다. 그의 시민청 앞에서 섰다. 으스러져 재가 되었으나 어느 정도 형태가 보전된 존경이라는 마음의 조각을 손에 쥐고 애도를 표한다. 그리고  땅에 묻어둔다.  이상은 없다. 없어야 한다.

변태시장이니, 가식적이니 따위의 말들을 굳이 방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입은  단어 대신 “가해자 말한다. 가해자는 무책임하며, 비겁했다. 피해자는 홀로 남겨졌고, 가해자는 사라졌다. 많은 국민이 가해자가 되기로 작정한  그를 위험에 빠뜨린다.

애도를 한다는 것과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분리되어야 한다. 조문을, 애도를 하든 말든  자유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자유의 영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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