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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Oct 22. 2022

사랑의 단상 - 롤랑 바르트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연민compassion. 사랑의 대상이 사랑의 관계와는 무관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불행하거나 위험에 처해있다고 느끼거나 보거나 알 때,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격렬한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니체 - "그 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우리가 그를 느낀다고 가정한다면 - 쇼펜하우어가 '연민'이라 부르는 것, 혹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고통 속에서의 결합, 고통의 일치라 할 수 있는 것 - 그가 자신을 미워하면 우리 또한 그를 미워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 환각에 시달리거나 미칠까 봐 두려워 한다면, 나 또한 환각해야 하고 미치광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힘이 어떠하든간에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끔찍한 일이기에 나또한 동요하며 괴로워하나, 도잇에 냉담하며 젖어들지 않는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

취소 :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사랑의 대상을 취소하게 되는 언어의 폭발. 사랑의 고유한 변태성에 의해,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로테는 무미건조하다. 주체인 베르테르의 저 강렬하고도 번민하는, 불타는 듯한 연출에 의해 무대에 올려진 한 초라한 인물일 뿐이다. 주체의 자비로운 결정에 의해 이렇듯 보잘것없는 한 인물이 무대 한가운데 놓여지고, 수많은 기도문과 담론으로 뒤덮인 채 찬미와 봉헌 혹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마치 정신나가나 수비둘기가 그 주위를 빙빙 도는데도 깃털 속에 웅크린 채 꼼짝않는 한 마리의 둔중한 암비둘기라고 할까? 이 취소된 대상으로부터 내 욕망을 욕망 그 자체로 옮기기 위해서는 어느 섬광 같은 순간에 그 사람을 일종의 무기력한, 박제된 사물로 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한다. 나는 이런 대의명분에 열광하며 내가 구실로 삼은 사람을 뒤로 멀어지게 한다. 나는 상상계를 위해 이미지를 희생한다. 드러다 어느날인가 그 사람을 단념해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때 나를 사로잡는 격렬한 장례는 바로 상상계의 장례이다. 그것은 하나의 소중한 구조였으며, 나는 그이/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처신 - 심의적인 문형.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는 아주 하찮은 처신의 문제를 고통스럽게 제기한다.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서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 

"나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완강하게 선택한다네. 난 표류를 선택한다네. 그래서 계속한다네."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는 행동의 처참한 연쇄반응이다. 불도는 카르마에서 벗어나기를, 인과관계의 유희를 정지시키기를 원한다. 기호를 부재케하고, 어떻게 할까라는 실질적인 물음을 무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질문하기를 멈추지 아니하며 카르마의 정지인 니르바나(열반)을 갈망한다. 그리하여 그 상황이 운 좋게도 어떤 처신의 책임감도 부과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일종의 평온함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괴롭기는 하지만 적어도 결정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사랑의 기계는 여기 나 없이 혼자 돌아간다. 전자 시대의 노동자나 혹은 교실 한구석의 장난꾸러기처럼, 나는 전기 있기만 하면 된다. 카르마는 내 앞에서, 하지만 나 없이 윙윙거린다. 나는 불행 그 안에서도 짧은 순간이나마 어떤 조그만 게으름의 구석을 마련할 수 있다.


살갗이 벗겨진 : 지극히 가벼운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는 사랑하는 사람의 특이한 감수성.


이미지 : 사랑의 영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아는 것보다 보는 것에서 더 많이 온다.


"누구를 원해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

사랑의 모험의 어려운 점은 "누구를 원해야 할지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나선 곧 사라져 버리세요"라는 데에 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모든 연적은 처음에는 스승/안내자/흥행사/중개자였다.


당신의 욕망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금 금지하기만 하면 된다. X는 내가 그를 조금 자유롭게 내버려두면서 그의 곁에 있기를, 때때로 자리를 비우면서도 '멀리는 가지 않는' 그런 유연성을 갖기를 바란다.


사랑의 우수: 소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엇인가가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사랑의 욕망의 미묘한 상태.


"당신을 잠시 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내 혀는 부서지고, 내 살갗 밑으로는 어떤 미세한 불길이 스며들어 내 눈은 보지도 못하고,,,"


"내가 아가톤을 포옹했을 때 내 영혼이 입술 위로 다가왔다네. 마치 그 불쌍한 영혼이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처럼." 이처럼 사랑의 우수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끝없이 사라진다. 마치 욕망이 이런 출혈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 사랑의 피로가 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입을 크게 벌린 사랑, 또는 내 모든 자아가 대신 자리를 차지한 사랑의 대상에게로 끌려가며 이전되는 것. 우수란 아마도 나르시스적 리비도에서 대상 리비도로 넘어가는 그 기진맥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밤 :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둠의 은유를 야기하는 온갖 상태로서 그 속에서 그는 몸부림을 치거나 진정시킨다.


외설스러움 : 현대적인 시각에서 그 가치가 폄하된 사랑의 감상적인 성격은 사랑하는 사람이 감당해야함ㄴ 하는 강력한 위반처럼 인식된 다. 어떤 가치전도에 의해 이런 감상적인 것이 오늘날 사랑을 외설적인 것으로 만든다.


자살의 상념

자살: 사랑의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때문에 자살의 충동이 자주 일어난다.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학자들은 동물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지 기껏해야 말이나 개 같은 몇몇 동물들만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고 싶은 충동을 가졌다 한다. 바로 이 말 이야기를 하면서 베르테르는 모든 종류의 자살을 특징짓는 고귀함에 대해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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