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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Mar 22. 2021

미나리

- 의도한 음악과 장면일까. 어떤 장면들은 정말 2000년대 할리우드 가족영화를 연상시키듯 과한 휴머니즘을 뿜뿜하던데.. 의도가 뭘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


- 온전히 그 포커스가 아시아인 가족에게 맞춰지며, 그를 둘러싼 소외나 인종차별 등이 비춰지지 않는 점은 특이한 지점이다. 내가 미국에서 영문학 수업을 들을때에도 아시안 아메리칸 작가가 쓴 소설들은 그러한 인종적 소외감 등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영화가 그러한 소설들의 연장처럼 느껴지면서도 (요즘 아시안 아메리칸 콘텐츠들의 경우 그러한 소외감 등은 주가 되지 않는데) 요즘 영화의 선언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트렌드를 따르는 것 같았다. 


-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하이틴 서사에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전형적인 스타일의 할리우드 무비에 아시안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쯤되면 PC에 민감해진 대중들을 위해 할리우드가 이제껏 쌓아온 포트폴리오들에 아시안, 멕시칸, 블랙 등을 끼워넣음으로써 영화계보를 거의 재건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전략의 의미는 크다. 백인의 서사를 아시안이 점유함으로써 어떠한 인종 계층의 상승을 보여줄 수도 있고, 소비자로서 그들에게 더욱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괜히 인종차별이니, 소외니 뭐니 운운하면 백래시도 있을 수도 있다. 어떨 때는 잘못된 선택으로 도리어 당사자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일쑤다. 가장 쉬우면서 명확한 방법. 대체는 당연한 선택이다.


- 그럼에도 여전히 미국에서 성장한 한국 아이가 느끼는 '한국 문화'에의 낯설음 등의 감정은 다소 지금껏 아시아계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들의 역전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 미나리도 '대체적 서사'의 연장에 서있다. 늘 무언가 가족이 정착하고, 갈등하고, 결국 화합하는 가족 서사는 백인의 것이었고, 정이삭은 이를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 아시안의 것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와 다를 바가 없는 전략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그 영화들이 피하는 '문화적 차별성'을 대번에 드러낸다는 점 때문이다. 한국에서 온 할머니는 고스톱을 보여주고, 한국식 사고방식(고추 운운하는 것)을 그대로 내비친다. 또 할머니가 미국 놈들과는 다르게 행동반경이 대담하고, 자연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뇌졸중 이후 귀신 떼찌 하는 것, 엑소시즘 등은 기존 동양 문화를 '신비적'인 것과 동치해 온 백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도리어 아시안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굳히는 역효과가 있지 않을까. 사회 내의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 이리도 어렵다. 이미 이야기되기도 전에 그들에게는 이미 편견의 프레임이 너무 견고하므로.


영화를 아무래도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정이삭 감독은 이러한 위험을 어떤 식으로 돌파해나가고 있나. 아니면 그저 이것은 감독의 기억 속 어린시절 정도로만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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