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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Apr 08. 2021

서울깍쟁이

뉴욕을 떠나는 날, 비로소 나는 뉴욕의 얼굴 전체를 보았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새벽 여섯시, 130번가로 향했다. 이 곳을 이제 떠난다는 허심탄회함도 잠시 곧 긴장감이 몸을 감쌌다. 무장경찰들이 역사와 길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곧 그 삼엄함의 이유가 보였다. 대마초 냄새를 풍기며 비틀 걷는 흑인 청년이 내 앞을 지나갔다. 맨해튼 어퍼 이스트사이드에서 지하철로 10분. 할렘에서 나는 비로소 뉴욕의 초상을 완성할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았다.


놀라울 것은 없었다. 뉴욕은 이미 찬란함만큼 더러움도 익히 알려져 있는 도시였다. 뉴욕 지하철은 더럽다, 쥐가 길거리에 나다닌다, 거지가 많더라 등의 이야기는 수도없이 들었다. 월스트리트에 월세 300만원짜리 아파트에 사는 여피족의 삶이 있다면, 맨하탄 끝자락 할렘, 퀸즈, 브롱크스에는 빈곤과 범죄로 점철된 삶이 있다고. 알고는 있었다. 서로 다른 삶의 결이 공존하는 부조화의 도시가 뉴욕의 진정한 얼굴이라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뉴욕이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 도시라는 곳이 그렇다. 균질함, 깨끗함은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 인프라나 시스템만 잘 되어 있다뿐이지 도시의 삶은 곳곳에서 소음과 고름이 터져나온다. 과거부터 필요에 의해 도시로 몰린 그 많은 이들이 모두 교양이 있을리가, 위생적일 리가 없다. 그러니 범죄, 콜레라 같은 전염병의 진원지는 으레 도시다. 또한 모두가 성공적으로 도시에 적응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낙오된다. 빈곤에 내몰리고, 빈부격차가 심화된다. 이것이 도시의 생리이다. (뉴욕은 그 불균질함이 매력으로 비화된 특이 케이스라고 본다.)


역설적으로 뉴욕의 판타지를 깎아먹는 그 더러움들이 결국에 뉴욕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한다. 그 이면이 부조리한 도시의 생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증상인 것이다. 정치인들이 미국에서 가장 잘 사는 뉴욕을 이야기할 때 빈곤문제가 우선이 되는 것도 그들이 그 도시의 생리를 익히 알고 있어서다. 


이에 비해 서울은 이상하리만치 균질한 프리미엄의 도시로 인식되어버린 지 오래다. 치솟는 부동산 가격, 지역-서울 간 불균형이 심화하고, 개천용신화가 붕괴하며 ‘서울프리미엄'만이 서울을 대표하는 언어로 우리의 뇌리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서울도 뉴욕처럼 여전히 불균질하다. 서울도 대도시이기 때문이다. 강남, 목동이라는 교육 1번지와 전국적으로 교육 낙후지역으로 손꼽히는 지역이 공존하는 곳이 서울이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아파트촌과 생활고로 남모르게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의 삶이 있는 곳이 서울이다. 모든 지역에 만연한 계층간 불균형을 고려하지 않는 서울- 지역의 우열 프레임 속에서 서울의 불균질함은 균질함으로 대체되어 공론장에 들어선다. 서울 사는 이는 모두 특혜자라는 시선이 공고해진다. 


“그래도 넌 서울 살잖아" 얼마나 이 말을 들었는 지 모른다. 서울깍쟁이, 서울 프리미엄이라는 것이 도시빈민의 소외를, 삶을, 정체성을 솔직하게 발언할 기회마저 박탈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지역불균형 해소, 주택공급의 요구에 여야는 모두 서울을 표적으로 삼는다. 서울시 보권선거가 치뤄졌고, 서울시 내 도시빈민 문제를 거론한 후보는 거의 없었다. ‘집값잡기'의 요구 속에 다시금 조용했던 서울에 재개발 바람이 부는 것도 머지 않은 듯하다. 불균질과 부조화가 난무하는 이 도시에 들이대는 섬세하지 못한 접근법들은 모두 소외를 더 소외시킬 뿐이다. 뉴욕처럼 우리도 서울의 진정한 얼굴을 들여다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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