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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Apr 20. 2021

4/19

마음을 쓴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나이를 측정하는 가장 정확한 지표다. 다른 일은 어찌저찌 남들 하는대로 하면서 대충 묻어갈 수 있지만, 사랑은 온전히 자신이 까발려지기 때문이다. 어릴수록 서툴다.


그 태도가 변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한다. 요즘 내가 그렇다. 이전에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표현할 때 그저 줬었다. 주는 것에 비해 덜 되받을까봐, 혹여나 내가 너무 많이 주는 것일까 두려웠어도 나는 내 마음을 “줬었다.” 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렇게 한 살, 두 살 먹었다. 상대방을 더 생각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내가 다 큰 줄 알았다.


마음을 주던 것이 쓰는 것으로 바뀌는 것은 내가 알지도 못한 채 한 순간이었다. 스물셋 언저리에 그 기로에 있었고, 정신없니 스물 네살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여기 있었다.


마음을 쓴다는 말이 뭐 그렇게 대단한 말은 아니다. 흔히 쓴다. 그녀에게 마음을 쓴다, 내가 마음 좀 썼어^^ 등 누군가의 친절함이나 호의를 표현하기에 이만한 단어는 없다. 그래도 내 마음에 “쓴다”는 것이 들어차는 것은 어째 내키지가 않는다.


“쓴다”는 준다와 다르다. 그 단어가 사용되는 주된 상황의 지극한 현실성 때문이다. 어제 마트에서 소세지를 사려고 5000원을 썼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비를, 택시비를 썼다, 토익공부을 하며 시간을 썼다. 모두 목적 달성을 위한 씀의 행위.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쓴다. 전염력이 이렇게 강한 단어였나. 사람들의 입에서 마음에 쓴다가 붙어버렸다. 그 단어가 내 일상의  표피를 뚫고 점점 내 마음의 핵을 향해 달려온다. 깊숙이 넣어둔 감정들까지 동화시키려고.


일상에서 쓰는 행위보다 마음을 쓰는, 감정을 쓰는 행위는 비겁한 느낌이다. 일상에서 쓴다는 행위의 전제는 내 신세, 처지에 적당하게, 일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알거지 된다.  언틋 합리적인 이 행위의 대상이 마음이 되면 구차해진다. 마음을 쓰는 것도, 내가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쥐뿔도 없으면서 그저 상대가 좋아허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은 쓰는 게 아니다. 월 천만원을 벌 때 비로소 구세군에, 재단에 눈길 세번 주는 사람처럼, 주는 게 아니라 쓰는 마음은 딱 그정도인 것이다.


마음도 쓰는 세상의 어른이  나는 이제 사랑에 앞서 수지 타산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정도의 사람에게 나는 얼마나 시간과 돈을   있느며,  상실을  사랑의 감정으로 얼마나 메울  있으며,  사람은 얼마나의 사랑을 불러일으킬지까지. 거부든, 승낙이든 요즘 내가 하는 사랑은 그래서 지극히 합리적이다. 이토록 합리적인 사랑을 하는 나는 찝찝하지만 나이를 먹은 것이 확실하다.


* 마음씀씀이가 좋다라는 말이 실은 얼마나 각박한 세상에서 나왔는지, 아무도 하지 못할 때 자기 마음을 거하게 내놓은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커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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