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한창 진로를 정하느라 고민중에 오익환선생님으로부터 간호사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 체육과 양호선생님을 겸직하며 늘 당당해 보였던 그분은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진 분이셨는데 간호사는 훌륭한 직업이라며 적극 추천해 주셨다. 난 무엇보다 취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말에 더욱 솔깃했다. 당시 여자 직업으로는 간호사와 교사가 우선순위에 있었는데 누군가를 돌본다는 간호사라는 직업이 내 성정과 맞았다. 결국 양호 선생님이 다녔던 간호대학에 들어갔고 선생님의 후배가 되었다. 학비가 저렴한 공립이라는 것 또한 진로를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4년제 대학의 과정을 3년에 마쳐야 해서 고등학교 시간표처럼 늘 수업 일정은 빡빡했다. 대학생활의 낭만 따위는 내 실정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짬짬이 학외 서클 활동으로 고됨을 풀었다. 2주는 학교에서 이론 수업을 하고, 남은 2주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병원이나 보건소, 정신병원 등으로 실습을 나갔다. 아침 근무로 배정을 받을 경우에는 새벽 5시 전에 출발해야 실습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 나간 실습지는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분만실이었다. 세 번이나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야 했는데 첫날 실습 때에는 가운과 흰 구두, 간호사 캡 등을 가지고 가야 했다. 도착한 실습병원은 으리으리해 보였다. 가운을 입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내심 언젠가 나도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간호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다른 병동과 달리 분만실은 특수 파트였다. 또다시 벨을 누르고 들어가야 하는 절차가 남아 있다. 연차가 있어 보이는 조산사의 안내를 받았다. 가운을 갈아 입고 흰 캡을 쓰느라 진땀이 난다. 밖의 날씨와는 무관하게 병원의 실내 온도는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좀 전에 우리를 맞이해준 중견 조산사의 오리엔테이션을 듣는데 그분에게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면서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때마침 분만대기실의 산모 한 분이 아기를 낳을 때가 다 되었다고 했다. 실습 첫날부터 출산을 볼 수 있다니! 행운이다!
분만실은 조용히 부산스러워졌다. 산모가 침대째 분만실로 옮겨지고 다시 허리춤까지 오는 좁고 높은 분만대 위로 올라갔다. 간간히 들리는 신음과 한숨 소리는 그녀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알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소독포가 오염되지 않도록 멀찌감치서 출산을 지켜보았다. 가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얼굴을 제외한 산모의 몸은 초록 수술포로 덮혀져 있었고 아기 나오는 곳만 환하게 무영 등이 비추고 있었다. 학생 간호사의 눈알 굴리는 소리와 간간히 산모의 신음소리만 들린다. 주치의 선생님이 기다란 소독 가운을 입은 후 간호사가 건네주는 소독 장갑을 끼고 아기 받을 준비를 했다. 산모의 다리 사이에서 까만 것이 보인다. 아! 아기의 머리카락이다. 힘을 주면 까만 것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서너 번 했을까? 아기의 머리가 나오자 몸이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아기는 우렁차게 울었다. 돌이켜보니 회음의 국소 마취도 했을 테고 회음절개도 했을 텐데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출산 장면을 신비하게 보고 있는 나와 달리 함께 실습을 했던 짝꿍은 그 모습을 보고 기절해 버렸다. 쓰러진 짝꿍을 옮기는라 잠시 부산스러웠으나 다시 돌아와 보니 주치의가 회음절개 상처부위를 봉합하고 있었다. 아기는 신생아 테이블로 옮겨져 능수능란한 조산사의 간호를 받고 있었는데 아기배에 연결된 탯줄을 가차 없이 싹둑 자르는 모습에 흠칫 놀랐다. 한편으로는 탯줄을 자르는 느낌이 어떨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버둥거리며 허공에 팔다리를 휘젓던 아기는 하얀 면포에 싸여 엄마와 한번 눈을 맞춘 뒤 신생아실로 가버렸다. 이후 태반이 나오면서 피가 울컥 나왔다. 잘려진 회음에서 묻어나는 피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붉은 피를 무섭다거나 더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본 탄생의 신비한 느낌은 내가 조산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물론 오리엔테이션을 준 멋진 중견 조산사도 나의 워너비였음을 고백한다.
1983년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나는 48033번째 대한민국 간호사가 되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병원에 취업을 하였지만 나는 3년 내내 벼르던 조산사 수련에 도전했다. "그렇게 작아서 어디 조산사를 할 수 있겠나?" 면접을 하는 무섭게 생긴 여자 원장님이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합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무섭게 생긴 원장은 대답 대신 미소를 보여 주었다. 마음이 콩닥거렸다. 힘든 교육 과정은 조산사로서 의사의 처방 없이 독립적인 출산을 돕는 나를 상상하는 것으로 상쇄되었다. 삼 교대를 하며 오후에 세 시간씩 수업을 들었다. 밤 근무, 꼭두새벽 별을 보며 나오는 주간 근무를 하면서도 수업 참여는 필수였다. 밤 낮도 바뀌고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불규칙한 조산사 생활의 서막이었다. 봄의 분만실, 여름의 신생아실, 가을의 병실, 겨울의 외래 근무를 마쳤다. 고되었던 일 년이 그렇게 지났다.
조산사 수련 중이던 1983년 장미가 지천인 오월에 난생처음 아기를 받았다. 조산사 수련의 꽃인 first case! 아기를 받은 수련생은 분만실 근무자들에게 떡을 돌렸다. 모두의 축하가 끝난 뒤 탈의실에서 나는 내 손을 쳐다보고 만지작거리며 혼자 웃었다.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는지 내 심장소리도 들렸다. 그로부터 일 년 후 1984년 5월, 조산사 면허번호 5862, 나는 드디어 대한민국 조산사 면허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