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더듬더듬 머리맡의 핸드폰을 잡았다. 다섯 시다. 어쩐지 밖이 깜깜하더라니. 다시 잠을 청하려 뒤척거렸지만 밝아오는 날처럼 정신은 점점 더 명료해졌다. 때가 되지 않은 일들이 하나씩 꺼내지며 긍정이 숨어버린다. 태어날 녀석들과 또 다른 일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데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한쪽으로 기울어 있던 빛이 점점 동그래지며 달이 크고 있다. 그만큼 나의 일이 다가왔음이다. 보름을 즈음하여 많게는 다섯 아기가 태어날지도 모르겠다. '순서껏 너희들끼리 상의해서 건강히 나오거라.' 느긋하자 느긋하자 마음먹어도 특별한 세포는 슬그머니 불안을 가져다 놓는다. 또렷이 보이지 않아도 두려워하지 말자. 지금 이 시간을 마주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하나씩! 마음을 다독이며 눈을 감고 깊게 숨을 쉰다.
아기를 받기도 하지만 제철마다 해야 하는 일도 있다. 겨울준비인 김장날을 정하고는 김장하는 날 아기가 태어나면 어쩔까 하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그 핑계로 계속 김장을 미룰 수는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엉망이 된 김치를 먹을 수밖에 없다. 해마다 주문하는 해남 농부에게 40킬로를 주문해버렸다. 배추를 절이고 씻는 일은 김장 담그는 일 중에 제일 힘들고 번거로운 것이다. 그 일을 무 자르듯 깔끔이 해결해 주는 절임배추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배려와 사랑을 받고 사는 것이 틀림없다. 낯선 김장 담그기를 수월하게 해주는 해남의 농부는 천사다. 첫 해, 미심쩍은 마음으로 시켰던 배추는 깔끔하고 적절히 절여진 덕분에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었다. 단골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 내게 처음으로 단골이 생겼다. 이제는 그곳 농부에게서 고춧가루도 셑트로 사고 있다. 해남의 햇빛과 바람과 농부의 땀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김장은 겨우내 밥상의 일등 반찬으로 올려질 것이 틀림없다.
일하러 다니는 딸을 위해 김장은 늘 어머니 몫이었다. 온 식구가 모여 치르는 김장하는 날에도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가족의 대소사는 늘 아기 받는 일에 차순위로 밀려났고 가족들도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아기 받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랬을까! 갖가지 김치들을 바리바리 차에 싣고 배달까지 해 주셨던 정성에 지금의 내가 있다.
종일 물마를 새 없이 두 손은 바쁘다. 양념을 씻고 썰고 버무린다. 딸과 남편이 없었으면 어쩔뻔했을까! 나르고 담고 닦는 일은 함께 사는 식구들이 해 내었다. 제시간에 배달된 절임배추 40킬로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속속 김치냉장고를 채웠다. 이번엔 백김치랑 깍두기, 파김치도 담갔다. 그득이 담긴 김치 냉장고를 보니 겨울이 푸근해진다.
김장이 점점 마무리가 되면서 몸은 여기저기 비명을 질러대지만 마음이란 녀석은 행복해졌다. 다행히도 진통이 시작된 사람은 없다. 아기들이 나의 사정을 잘 알고 봐준 것이 틀림없다. 깔끔이 부엌을 치우고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메시지가 왔다. 셋째를 품은 산모다.
"선생님 양수 같은 것이 나왔어요~"
아직 진통은 없으니 조금 기다려보자고 했다. 산모는 기다리지만 나는 또 할 일이 생겼다. 출산할 때 따듯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러 출산센터로 간다. 뜨끈뜨끈한 방을 만들어 놓았다.
여섯 시부터 제법 강한 진통이 왔다. 아침 여덟 시, 출산센터는 분주해졌다. 수중 출산을 위해 따듯한 물이 준비되고 산모는 둘라와 함께 여러 가지 운동을 한다. "배고파 죽겠어요!"아기를 만나기 한 시간 전 산모가 외쳤다. 아기를 낳으며 본능이 불쑥 튀어나왔다.
대부분의 진통하는 산모는 피곤하고 지친 와중에도 배가 고프다. 먹을 수 있다면 뭐든 먹어야 한다.
배가 고프다고 느끼는 것은 스트레스라
얼른 뛰어나가 바나나 우유를 사 왔다.
달달한 단물을 마신 산모는 힘을 낸다.
열 번의 진통 후에 아기는 물속으로 나왔다. 눈을 뜨고 우리들을 둘러본다.눈물이 날까 말까, 시야가 흐려진다.
달래주면 조용하고 쳐다보지 않으니 큰 소리로 운다.
오냐오냐 너만 쳐다봐 줄게!!
다섯 아기 중 한 명이 순조롭게 태어났다. 덕분에 연이어 태어날 녀석들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 김장 다 마치고 태어나줘서 고맙다! 아가야!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 보름이로구나! 기특하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