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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Oct 07. 2023

연필에 대한 단상 1

일상

      

글쓰기 수업에서 알게 된 친구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선물이예요. 좀 특이한 연필이라고들 해요."

별거 아니라며 수줍게 건네는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글쓰기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낯설어 하는 내 마음을 알아 챈 걸까?  나는 아직도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연필을 받으며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섞였다. 선물이라는 녀석은 무게와는 별개로 주는 이나 받는 이에게 똑같은 양의 기쁨을 주는 마법을 부린다.


알고 보니 그 날 모인 글 쓰는 친구들도 그녀로부터 연필 선물을 받았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마음이 들었는지 모두들 연필 예기로 잠시 화기애애해졌다.     


연필은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포장하기가 어려웠을 연필 끝도 깔끔하게 스카치테이프로 봉해져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며 포장을 했을 친구의 모습이 그려졌다. 포장지를 벗기자 아이보리색 펄이 섞인 색깔의 연필이 나타났다. 육각형 연필 단면에는 Black Wing- Pearl이라는 황금색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단아한 아이보리 색에 화려한 황금색 글씨는 활짝 핀 신부의 드레스처럼 빚나보였다. 실눈을 뜨고 연필을 가까이 보니 안개 낀 신비한 바다처럼 보인다. 아, 바다도 들어있구나!      


연필 끝에는 흰색의 사각형 지우개가 달려 있다. 별거 아닌 듯 보이지만 이 연필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싶다. 벽돌색의 동그란 지우개 일색인 연필들의 세상에서 흰색의 사각형 지우개는 런웨이를 빛내는 새로운 디자인의 옷처럼 빛이 난다. 지우개를 다 썼을 경우에는 지우개만 새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도 했다. 지금껏 연필 지우개를 다시 끼워 쓰는 연필은 본적이 없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특별한 연필인 것이다.   

  

보통의 연필에 달린 지우개는 품질이 좋지 않다. 자주 공책을 찢어댔고 연필보다 먼저 닳아 없어지기 일쑤였다. 계단처럼 구불구불 삼각형모양으로 찢어진 공책을 펴며 얼마나 속상했던지. 이 연필에 달린 지우개는 그렇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마치 신문물을 영접하듯 아직 깍지 않은 연필을 들고 왼손과 오른손으로 써보는 흉내도 내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았다. 처음 연필을 본 사람들이 이랬을까. 슬금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연필을 보니 초등학교 일학년 시절이 떠올랐다. 손수건을 단 코트를 입은 나는 의기양양 엄마의 손을 잡고 교실로 들어갔다. 어깨에 맨 빨강 가방 안에는 새 공책과 책들로 가득했다. 모든 것이 다 새것이었지만 필통 속 가지런한 연필들이 유독 좋았다. 아마 연필에서 나오는 향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겨간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입학식에만 왔다갔다. 엄마를 대신해서 이모들이 나를 챙겼다. 학교에서 썼던 뭉똑해진 연필은 이모들이  다시 깍아 주곤 했다. 그 중 큰 이모의 연필 깍는 솜씨는 단연 일품이었다. 다시 깍아진 삼각뿔의 연필들을 보면 마음이 두근거렸다. 가끔은 책상 한 귀퉁이에 연필을 자랑하고 싶어 필통을 열어놓기도 했다. 아이들도 나처럼 이모들이 있었는지 내 연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연필로 받아쓰기 백점도 받고 바둑무늬 국어공책에는 늘 빽빽하게 글씨가 채워졌다. 집으로 가져오는 뭉뚝해진 연필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연필에서 나는 향나무 냄새는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종종 엄마가 그리워질 때면 연필 향기를 맡았다. 연필에서 나는 향기는 내게 그리움이 되었다.     


어린 초등시절이 지나자 자동 연필깎이가 등장했다. 기계에 뚫린 구멍에 연필을 넣고 다섯 번 정도 돌리면 순식간에 큰 이모가 깍아 주었던 연필처럼 변했다. 신기해서 마구 돌리다보면 연필이 반 토막 나는 건 시간문제다. 극성스런 남자아이들은 잘도 그 짓을 했다. 나는 자동 연필깎이가 연필심과 향나무를 사정없이 깎아 내는 것이 싫었다. 내가 스스로 연필을 깍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자동 연필깍기는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밀려났다.      


연필을 깎는 행위는 내게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바닥에 종이를 깔고 연필들을 나란히 놓는다. 깍기 쉬운 긴 연필부터 깍기 시작한다. 짧은 몽당연필을 깍는 것은 힘이 들어서다. 연필 깍기에 한 눈 팔기는 용납되지 않는다. 다치지 않아야  하고 예쁜 삼각 윈뿔도 만들어야 한다.

얇게 저며지는 나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경건해진다.  


깎인 연필 속 검은 흑연에겐 더욱 신경을 써야만 한다. 연필심이 무른 경우엔 나무 깍는 정도로 힘을 쓰면 쉽게 부러진다. 무른 심과 단단한 심을 다룰 줄 알아야 연필깍기 대가가 된다. 갖가지 연필을 깍아 보면 연필 색이 짙을지 옅을 지도 알 수 있다. 뭉텅뭉텅 깍이는 흑연은 짙은 글씨로 쓰이고 사각사각 깍쟁이 같은 소리를 내는 흑연은 강하고 연하게 써진다,

나는 늘 사각사각 소리가 명확하게 들리는 후자의 연필을 사랑했다.


연필을 건네받으며 감사의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덜컥 몽당연필이 되도록 써 보겠다고 말해버렸다. 약속은 둘째 치고 잃어버리지나 말아야지.

집으로 돌아와 연필을 깎았다. 그리움을 품은 연필 향기가 방안으로 펴진다.

 ‘안녕’이라는 글을 쓴 후 하얀 지우개로 지워보았다. 기대한대로 엄청 잘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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