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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Aug 10. 2024

오이, 오이, 또 오이

어설픈 시골생활

홍천 시골집 동네 이름은 '가래들길'이다. 이름을 되뇌어 불러보면 푸근하니 따듯함이 느껴진다. 나는 '가래들길'이라는 이름이 좋다. 옛날엔 강원도  태백산맥을 넘나든 상인들이 중간쯤 쉬어가는 곳이기도 해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물이 흔한 이곳은 소나 말에게 물도 먹이고 사람들은 주막에서 허기를 달래는 장소로 붐볐다. 까마득히 먼 과거의 장면은 지금의 풍광과 사뭇 다르다. 지금은 여느 우리나라 도시처럼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낮에는 사람을 만나보기가 힘들 지경이 되었다.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점점 나이 들어가는 토박이 어르신들만 고향을 지키고 있다.

나는 요 몇 년 동안 3도 4촌을 하다 보니 1년이 똑같은 듯 똑같지 않게 흘러간다. 단지 변하는 건 뉘 집 어르신이 세상을 뜨셨고, 또 다른 집엔 치매가 걸리신 할머니 위해 간병인이 들락거린다는 소식도 들린다. 아이들 소리는 끊긴 지 오래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는 새소리와 매미소리, 개구리 소리 등이 전부이다.


어설픈 도시민은 3월만 되면 일찍이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렸다. 이상하게도 동네는 여전히  조용했다. 강원도의 봄은 늦어서 4월이나 돼서야 밭을 갈고 모내기를 하며 씨앗과 모종을 심는다는 것을 안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운이 좋지 않으면 4월에도 서리가 내릴 수 있어 파종한 작물들이 얼어 죽기도 한다고 했다. 농사는 인간의 욕심과는 별개로 하늘도 도와야만 할 수 있다는 말이 맞다. 자연은 흙과 뒹구는 농부에게 즐거움도 주지만 가끔은 끝없어 보이는 포기와 절망도 함께 가져온다. 그래도 그 못지않게 꿋꿋한 농부들이 있다. 가끔 너무나 반듯반듯한 작물들과 주렁주렁 달리는 열매들을 볼 때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동네분들이 서두는 우리를 보고 얼마나 많이 혀를 찼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멀직멀직 떨어져 있는 집들 사이로 비닐하우스들이 많다. 동네의 하우스 안에는 캡오이 농사를 주로 짓는다. 오이가 10센티 정도 자라나면 밖에 플라스틱 껍데기를 씌운다. 원래는 동그랗게 자라는 오이는 캡모양으로 반듯하게 자라게 된다. 그래서 오이 이름은 캡오이라고 붙여졌다. 시중 마트에 가면 일매지게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있는 오이들이 바로 그것이다. 캡오이는 다른 작물들보다  값이 좋아서 이 동네 사람들 모두가 캡오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다음으로 짓는 농산물에는 인큐애호박과 고추, 마늘, 홍천의 명물 찰옥수수도 심는다.


여름이 되면 이 집 저 집서 못난이 농산물을 한 아름씩 주고 가기도 하는데 특히나 오이와 호박은 마트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져다준다. 가끔 동네분들은 말도 없이 문 앞에 두고 가기도 한다. 어떤 때는 어찌나 많이 주시는지 난감할 때도 있다. 도시에 친구들에게 인심도 쓰고 그동안 아껴 먹었던 오이와 호박을 여름 한철 동안에는 배 두드리며 먹는다.


열기 가득한 하우스 일은 더위를 먹기가 십상이라 동네분들은 주로 이른 아침과 저녁에 일을 한다. 그러나 열매가 많이 열리는 성수기엔 어쩔 수 없이 낮에도 일을 해야만 한다. 한 달 가량 폭염 속에서 일을 한 이웃 아주머니는 벌써 7킬로나 살이 빠졌다고 한다. 마침 못난이 농산물을 받아먹은 후 보답을 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참에 일손을 보태기로 했다. 대신 쉬운 일로, 오전 딱 두 시간만.

다행히 구름이 끼고 비도 오락가락해서 하우스 안은 견딜만한 온도였다. 우선 인큐호박에 비닐을 씌웠다.(호박이 15센티 정도 커지면 비닐을 씌워 호박의 크기를 일매지게 하기 위함.) 또 다른 일은 하우스에서 자랐던 오이 넝쿨을 거두는 일이다.


이제 막 열매를 맺으려 하는 오이들도, 열심히 넝쿨을 타고 올라 노란 꽃을 피운 것들도  가차 없이 잘라내라고 했다. 중간중간에 제법 먹을 만한 크기의 오이들은 따로 바구니에 담았다. 어린 오이의 여린 가시는 투명하게 빛이 났지만 장갑을 낀 손안에까지 들어와 살갗을 찔러댔다.


단순노동은 가끔 명상을 할 때와 같다. 왼손은 오이 넝쿨을 잡고 오른손은 열심히 가지를 자른다. 고요한 마음이 갑자기  뒤흔들릴 때도 있다. 잎새 뒤에 달려 있는 오이를 발견할 때, 나도 모르게 "심봤다!"소리를 외친다. 하우스가 들썩인다. 고요히 가지치기를 하고 있던 이웃들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오이를 발견했을 때도 이리 신이 나는데 진짜 인삼을 발견한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또다시 명상 모드에, 들어갔다가 또다시 심봤다를 외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아무리 구름 낀 날씨여도 여름은 여름인지라 옷은 땀으로 흥건했다. 이웃은 일손을 도와주어 일이 쉽게 끝났다고 고마워하며 두부전골집에 가서 점심을 샀다. 주렁주렁 사이좋게 매달려 있던

오이 한 바구니도 선물로 받았다.


적당히 자란 오이는 오이소박이로,

울퉁불퉁 큰 오이는 오이깍두기로,

누렇게 늙어버린 노각은 고추장 무침으로,

정말로 못생긴 오이는 오이지로,

동생네 한 통,

딸네 기숙사에 한 통,

우리 집 냉장고로 네 통,

반나절을 썰고, 깎고, 삶고,


자려고 누우니 눈앞에 크고 작은 오이들이 동동동  떠다닌다.

꿈속에도 오이를 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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