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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Aug 23. 2024

고추가루 자급자족 프로잭트

어설픈 시골생활

지난봄에 작은 하우스를 지었다. 하우스에 뭘 심을까 하고 시골집을 함께 가꾸는 동생네랑 머리를 맞댔다. 우리는 고춧가루의 자급자족을 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일 년 동안 먹는 고춧가루는 열근이면 그럭저럭 살 수 있다. 집밥을 즐겨먹는 우리도 그 정도다. 두 집이 일 년 동안 먹을 양은 텃밭에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마다 막연한 꿈들이 있는데 고춧가루의 자급자족은 밭이 없을 때부터 막연하게 품었던 바람이었다. 해마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 고추 모종을 심으면서도 최소한 고춧가루의 자급자족은 이루고 싶었다.

올해, 좀 더 넓은 밭과 비닐하우스가 생겼으니 작은 소망을 이루게 될 것이다.


쌀쌀한 봄날, 고추를 심기로 한 땅에 거름과 영양제를 뿌리고 흙을 골고루 섞었다. 이웃 트랙터가 우리가 며칠 걸려 해야 할 일을 단 한 시간 만에 마쳤다. 땅이 포슬포슬하게 새 옷을 입은 듯 보였다.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달릴 상상을 해서일까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다녔던 흙이 이뻐 보였다. 쪼그리고 앉아 흙장난을 했다. 손끝에서 부서지는 흙, 말없이 주기만 하는 흙이 문득 고마웠다.


밭을 갈아 놓고선 이웃들이 고추를 언제 심는지 기다렸다. 강원도의 봄은 갑작스레 기온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종종 일찍 심었다가 냉해를 입기도 한다. 그저 우리는 이웃들이 언제  고추를 심는지를 수시로 확인해야만 했다. 시간을 재촉한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니지만 땅을 가꾸어 놓은 후 시간은 참 더디 흘렀다.


땅 만 만들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은 이웃 형님께 어설프게 배워온 수로를 만들어 묻고 모퉁이마다 파이프로 연결했다. 파이프는 200리터 물동에 연결되어 있는데 펌프에 전기를 넣자 구멍 뚫린 호스에서 졸졸 물이 나왔다. 별거 아닌 것에도 우리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이것저것 부품을 사러 세 번이나 들 들락거리며 나를 귀찮게 한 것만 빼고는 정말 훌륭했다.


물 주는 호스와 땅을 덮은 비닐멀칭 등은 가을 추수를 마치면 모두 걷어내야 한단다. 겨울이 가면 다시 밭을 일구고 수로를 만들어야 한다.

외우는 것에 젬병인 남편이 내년에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냉큼 내려놓았다. 지금이 중요해서다.


계절이 바뀌는 데로 우리는 순리를 따라 농사를 지어야 한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어 보였다. 다른 일을 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고춧가루를 사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봄날, 장터에는 갖가지 모종들이 선을 보였다. 모종 가계 앞에 서면 도서관이나 문방구를 갈 때처럼 설렜다. 어른들의 마음이 두근대는 모종 가계 앞엔 아이들은 없고 중장년, 노년들로 장사진이다. 순서를 기다리며 신기하게 생긴 싹 들을 살핀다. 제대로 키우는 방법도 알지 못해도 온갖 모종을 다 사고 싶은 충동구매욕이 솟구친다.

고추 모종을  60개 샀다. 네 줄로 나누어 50cm 간격으로 심었더니 네 줄이 되었다. 조금 남아있는 뒤쪽엔 청양고추 열 개도 심었다. 고무 통에 물을 받고 스위치를 올리니 고추와 나란히 묻어진 튜브 구멍에서 물이 나온다. 얼른 마시고 무럭무럭 자라라!

모종을 심은 후 거의 며칠을 고추 비닐하우스에서 보냈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초보 농부가 되었다.

...

우여곡절 끝에 흰 고추 꽃이 폈고,

귀여운 고추가 열리기 시작했다. 갈라진 가지 사이에 난 순을 방아다리라고 했다. 다른 가지가 더욱 튼실 해지도록 떼어버려야 한다기에 열심히 가지를 떼어냈다.


이웃 선배 농부는 이틀 간격으로 물을 줘야 하며 일주일에 한번 영양제도 주라고 알려주었다. 진딧물이 생기기 시작하면 얼른 약도 주라고 했다. 그러나 3도 4촌을 하는 우리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일이 생겨 도시로 나와서는 그저 걱정만 했다. 유난히 고추 걱정이 드는 날이면 더욱 속상했다. 그게 뭐라고, 고추농사가 본업이 아니니 어쩔 수가 없다며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시골에 도착해서 맨 처음 하는 일은 고추밭 물 주기였다.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고추밭으로 달려갔다. 내 마음까지 휘휘 섞어 물을 주었다. 사람 발자국 소리가 그리웠을 고추는 그래도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간간이 빨간색으로 변한 고추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주쯤이면 제법 빨간 고추가 달릴 것이라 예상했다.


빨간 고추를 따는 한여름은 참 고되었다. 두 광주리를 따는데 온몸이 땀범벅이다. 고추 연근, 자급자족을 하려 했던 마음이 점점 작아졌지만 벌려놓은 농산물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올해까지는 누가 뭐래도 마무리를 해야 한다. 그러리라고 다짐했다.

처음으로 딴 두 광주리의 고추는 이웃집 고추 건조기의 힘을 빌려 말리기로 했다. 이웃들은 농사 전기를 끌고 건조기를 사라고 부추겼지만 우리처럼 재미로 짓는 농사에는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잠시 솔깃하긴 했지만 역시나 그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이웃 건조기에 우리 고추가 들어갔다. 고추가 바삭하게 마르려면 이삼일이 필요하단다. 그 사이 우리는 도시를 두 번 왕복했다.


일주일 만에 시골에 왔다. 고추밭엔 빨갛게 익은 고추들이 뽐내고 있다. 다시 두 소쿠리를 따서 하루 묵힌 후 깨끗이 씻어 이웃의 건조기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맡겼던 첫 물이 나왔다. 어쩜 이리도 예쁠까. 많고 적고를  떠나 가슴이 벌렁댄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빨강은 마른 고추가 아닐까. 내가 심고 가꿔 태어난 빨간 고추라니! 작년처럼 마른 고추를 햇살에 비춰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노란 황금 동전이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자급자족을 넘어 장에 내다 팔아도 될 듯하다. 남은 고추를 거두려면 한 바가지 이상 땀을 바쳐야겠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올해 목표를 초과 달성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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