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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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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Aug 26. 2024

오늘 아침

산파일기

안개는 산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마당 풀잎들 위엔 밤새 내린 이슬이 맺혔다. 아무리 가물어도 자연의 요술로 땅 위의 것들은 밤이 내린 이슬에 목을 축인다. 천천히 흙을 밟으며 그 위에 나온 것들을 살폈다.

하우스 뒤편에 조용히 자라고 있는 풀들이 10센티나 커졌다. 또다시 이른 아침부터 풀 뽑기 삼매경에 빠진다. 무릎이 뻐근해져 일어서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다음 달 초 셋째 아기를 만날 산모다. 순간 진통 소식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직 예정일이 되려면 열흘이나 남아있다. 그녀는 둘째 아기도 이 즈음에 낳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몸은 정신을 못 차린 채 단순노동인 풀 뽑기를 하던 참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머리와 몸이 동시에 바빠졌다. 열 일을 제치고 돌아가야 한다. 내 몸은 젊었던 시절부터 산모의 진통 소식에 제일 빠르게 반응되도록 진화했다. 어떤 일도 나를 이토록 빠르게 만들진 못한다. "저 지금 홍천에 있어요. 잽싸게 달려갈 테니 다른 특이 증상이 있으면 다시 전화 주세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축지법을 쓰지 않는 이상 한 시간 반은 길 위에 있어야 한다. 나는 도사가 아니니 축지법은 괜한 소리, 어찌 됐건 한 시간 반은 필요하다.


남편이 내달린다. 조수석의 나는 사실 할 일이 없는데 아무 말 없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는다. 마침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길 위가 출퇴근 시간임에도 평안하기를,

뱃속 아기에게도 한 시간 반은 기다려 달라고, 문득 딸들의 오늘이 행복하기를,

고추 따느라 햇살에 새카매진 남편의 왼 팔뚝에 로션을 발라주며 그렇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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