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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Oct 17. 2020

전기 없는 출산

아기를 낳다.

  1988년 올림픽이 있었던 늦가을의 어느 날, 천둥이 치고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스믈 여덟의 조산사 5년 차의 나는 수원 모자보건센터에 야간 당직 근무 중이었다. 이제 막 한 발 짝씩 발을 떼는 딸의 재롱을 뒤로하고 저녁에 출근을 한다. 엄마가 사라지는 것이 싫어 할머니 품에서 칭얼대지만 할 수 없다.

  옷이 다 젖은 채로 근무지에 도착했다. 퇴근을 하는 직원들을 배웅하며 오늘같이 궂은날에는 출산 산모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바람은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눕자마자 울리는 비상벨에 날아갔다.

  일층으로 내려가 문을 여니 비 맞은 산모가 진통을 견디며 배를 잡고 구부정히 서 있다. 남편은 지방 출장 중이라 대신 노모가 보호자로 함께 왔다. 얼른 보일러 온도도 높이고 난로도 켰다. 비는 여전히 세차다. 순간, 번쩍 번개가 치고 타닥! 쿵! 하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더니 전기불이 나갔다. 밖을 내다보니 근처 모두가  암흑이다. 일단 더듬더듬 초를 둔 곳을 찾아 불을 붙였다. 진통실과 분만실에 세 개의 촛불이 켜졌다. 발전기를 돌리려면 전기 기사가 와야 되지만 오는 동안 아기가 태어날 것 같았다. 그나저나 경산인 그녀는 진통이 잘 온다.

  기가 찼지만 할 수 없다. 옛날에 모든 출산은 대부분 호롱불 아래서 이루어졌겠지만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아 참 난감했다. 출산준비를 마치자 어두 컴컴한 진통실의 어미는 벌써 힘이 들어가는 소리를 냈다. 진행이 생각보다 빠르다. 희미한 불빛을 보며 분만대까지 부축을 했다. 더 세심히 살피고 정확해야만 한다. 두 개의 초가  더 밝혀졌다. 아기도 잘 내려오고 산모도 힘을 아주 잘 준다. 서너 번 힘을 주자 아기가 태어났다. 흐린 불빛에 태어난 아기와 산모는 다행히 건강했다.  안정감을 느끼는 산모는 일반적으로 아기를 쉬이 낳는다. 진행이 빨랐던 이유가 정전 덕분이 아니었을까? 어두운 뱃속에서 밖으로 나온 아기 또한 눈이 부시지 않아 행복했을 거다. 그 시절 누구도 몰랐던 아기를 위한 르봐이에 분만을 한 셈이다.


  만약 촛불도 없었다면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을까?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불빛이 없어도 아기는 태어났을 테고 후산도 되었을 거다. 그나마 촛불이라도 있었으니 좋은 세상이란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그 촛불 빛 아래서  탯줄을 자르고, 아기도 살피고, 태반이 나오도록 돕고, 회음의  상처도 봉합하였다.


  촛불을 들고 산모와 아기를 방으로 옮긴 후 미역국을 끓이고  밥도 지었다. 크지 않았던 모자보건센터는 밤 당직을 하며 산모에게 미역국을 끓여줄 아주머니를 고용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도 아기를 받은 후 노련하게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하는 나의 빠른 손놀림은 그 시절부터 시작된 셈이다.  결국 전기는 내가 끓인 미역국을 먹을 때까지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촛불만 켜고 출산을 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세상에서 가장 분위기 있는 출산을 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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