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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트릭 Apr 27. 2020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공동체의 연대에 대하여

<분노의 포도>(민음사) 리뷰

<분노의 포도>(민음사) 1, 2권


    오늘은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인 <분노의 포도>에 대하여 다루어 보겠습니다. 1939년에 발표한 이 작품으로 스타인벡은 1940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노의 포도>는 출판 당시 무려 43만 부가 팔리고,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클라호마 주와 캘리포니아 주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왜 이렇게 논란이 되었는지,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시죠.




1. 분노의 포도


    이 작품의 주인공은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에서 대대손손 농사를 지어온 조드 가족입니다. 1930년대 중반 미국 중남부에 몰아친 엄청난 모래 폭풍 때문에, 많은 농부들이 농사를 망치고 빚을 감당하지 못 하여 땅을 빼앗기죠. 삶의 터전을 잃은 조드 가족은 살아남기 위하여, 일자리가 있다는 전단지를 보고 서부의 캘리포니아로 향합니다. 무려 10명이 넘는 대가족이 트럭 1대에 의지하여 2,000마일(약 3,200km)을 달립니다.


    "뭣 때문에 마을 사람들을 쫓아내는 건데?"
    "아, 놈들 얘기야 근사하지. 그동안 우리가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 알아? 먼지바람이 불어와서 모든 걸 죄다 망쳐 버리는 바람에 농사가 형편없었지. 개미 똥구멍을 막을 만큼도 안 됐으니까. 그래서 다들 식품점에 외상을 지고 있었어. 그런데 지주들은 소작인을 둘 여유가 없다면서 소작료가 자기들 이윤이니까 그걸 잃어버릴 수는 없다는 거야. 그러면서 땅을 하나로 합쳐야 간신히 수지가 맞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놈들이 트랙터를 갖고 와서 소작인들을 전부 쫓아낸 거야."


    머나민 길을 달리는 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들 노아과 사위 코니는 가족을 두고 떠나 버립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지만, 거기에도 희망은 없었죠. 조드 가족과 같은 처지인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고 있었고,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농장주들은 이 상황을 악용하여 아주 낮은 임금으로 사람들을 쓰고, 사람들은 굶주려 갑니다.


    값을 유지하기 위해 덩굴과 나무의 뿌리가 만들어 낸 열매들을 파괴해 버려야 한다. 차에 가득가득 실린 오렌지들이 땅바닥에 버려진다. 사람들이 그 과일을 얻으려고 먼 길을 왔지만, 그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냥 차를 몰고 나가서 오렌지를 주워 올 수 있다면, 12개에 20센트를 주고 오렌지를 사먹을 사람이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며 과일을 먹고 싶어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색 오렌지 위에는 휘발유가 뿌려진다. (중략)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조드 가족은 발버둥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천막촌을 전전하고 여러 농장을 돌며 일을 하죠. 그러나 농장 일도 점점 줄어들고, 앞날을 걱정하는 와중에 폭우까지 쏟아집니다. 딸 로저샨은 폭우 속에서 출산하지만 사산이었고, 트럭은 물에 잠깁니다. 결국 비를 피해 조드 가족은 아무 헛간에나 들어가는데 거기서 굶어 죽어가는 남자를 만나고, 로저샨이 그 남자에게 모유를 먹이며 작품은 끝이 납니다.


    샤론의 로즈는 빗소리가 작게 들리는 헛간에서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지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이불을 여몄다. 그녀는 천천히 구석으로 가서 남자의 쇠잔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겁에 질려 크게 뜨고 있는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옆에 누웠다. 남자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샤론의 로즈는 이불 한쪽을 열고 자신의 가슴을 드러냈다. "드셔야 해요." (중략)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 뒤로 돌아가서 머리를 받쳤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건너편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한데 모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2. 더스트 보울, 루트 66, 그리고 오키


1935년 텍사스 (출처 : 위키피디아)
1936년 오클라호마 (출처 : 위키피디아)


    작품을 읽다 보면, 도무지 밝은 미래라고는 찾을 수가 없어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 끝없는 절망의 시작은 삶의 터전을 잃게 만든 모래 폭풍이었죠. 실제로 1930년대 중반,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를 비롯한 미국 중남부 지역에 극심한 가뭄과 함께 엄청난 모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농사는 고사하고 일상 생활이 어려운 환경이었고, 이 시기를 가리켜 "더스트 보울(The Dust Bowl)"이라는 하나의 고유 명사가 만들어질 정도였죠.


루트 66 (출처 : 위키피디아)
1937년 캘리포니아를 향해 가는 가족 (작가 : 도로시아 랭)


    66번 도로는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이다. 흙먼지와 점점 좁아지는 땅, 천둥 같은 소리를 내는 트랙터와 땅에 대한 소유권을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게 된 현실, 북쪽으로 서서히 밀고 올라오는 사막, 텍사스에서부터 휘몰아치는 바람, 땅을 비옥하게 해주기는 커녕 조금 남아 있던 비옥한 땅마저 훔쳐가 버리는 홍수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은 좁은 도로와 수레가 다니는 길과 바큇자국이 난 시골길을 달려와 66번 도로로 들어선다. 66번 도로는 이 작은 지류들의 어머니며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이다.


    조드 가족과 같은 처지에 있던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를 향해 갑니다. 이들에게는 캘리포니아로 가는 "66번 도로(루트 66)"가, 한 줄기 빛이자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니, 절망에 가득찬 "오키(오클라호마 출신 놈)"들이 넘쳐나죠. 가난도 서러운데, 기존 서부 사람들은 이들을 오키라고 비하하면서 거지 취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키들은 참고 견디면서 일합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오키들. 지주들은 오키들을 미워했다. 자기들은 피둥피둥 살이 쪘지만 오키들은 굶주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도시의 장사꾼들도 오키들을 미워했다. 오키들이 빈털터리였기 때문에. 도시 사람들, 소규모 은행가들도 오키들을 미워했다. 그들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들도 오키들을 미워했다. 배고픈 사람은 반드시 일자리를 구하려 할 테니까. 만약 오키들이 무슨 수를 써서든 일자리를 구하려 한다면 임금을 지불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임금을 깎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돈을 더 받지 못 하게 될 것이다.




3. 공동체의 연대


1963년 존 스타인벡 (출처 : 위키피디아)


    존 스타인벡은 1937년 차를 타고 서부로 간 경험이 있는데, 이 때 보았던 많은 오클라호마 출신 이주민들이 작품의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힘든 현실을 워낙 적나라하게 표현하다 보니, 작품에 등장하는 오클라호마와 캘리포니아는 심기가 불편했겠죠. 그러나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 때문에 너무나 암울했기에, 이처럼 절망적인 가난 속에서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스타인벡은 조드 가족의 입을 빌려,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사람을 살게 만드는 건 "공동체의 연대"라고 말합니다.


    "국영 천막촌을 생각해 봤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던 것. 싸움이 나면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했죠. 총을 흔들어 대는 경찰이 없는데도 경찰이 있을 때보다 더 질서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자신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모두 협력하면 되는데. (중략) 뭐, 케이시 말처럼,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영혼의 한 조각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문제될 게 없죠. 저는 어둠 속에서 어디나 있는 존재가 되니까.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국어사전에서 "연대"라는 말을 찾아보면, "1.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2.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라고 나옵니다. 악덕 농장주에게 맞서 품삯을 한 상자 당 5센트를 받기 위해 파업을 하는 것은 연대입니다. 나도 먹을 게 하나도 없지만, 굶어 죽어가는 한 사람을 위해 모유를 내어주는 것도 연대죠. 우리 인간이 개개인으로 있을 때의 힘은 미약하나,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때의 힘은 훨씬 강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연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작품, <분노의 포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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