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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비줌마 Jul 06. 2021

소통

부모와 자식의 죽음에 대한 무게

며칠 전 지인 가정의 장례가 있어 '벽제승화원'에 다녀왔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것은 당해보지 않으면 그 무게를 누구도 뭐라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시부모의 죽음을 지켜보며 장례를 치렀기에 그것을 어느 단어, 아니 문장으로 설명을 한다 해도 아마 끝없는 설명이 될 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승화원에서 본 어느 가정의 장례의식은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니고, 그 상황을 잘 모르기에 뭐라 지적한다는 것이 말 그대로 쓸데없는 오지랖에 주제넘은 짓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정말 화가 났다.

고인이 얼마나 서운할까, 아니면 억울할까 하는 생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부모상을 치르면서 3일장부터 5일장, 혹은 7일장의 긴 시간을 장례기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7일 간격으로 7번의 제사를 지내는 49재를 비롯하여 3년 동안 묘지 근처에 초막을 짓고 부모를 지켰던 3년상이라는 의식도 행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성경에서도 다윗이 전쟁에서의 승리 소식보다 더 궁금했던 것은 자신에게 대항하여 '압살롬의 난'을 일으켰던 아들 압살롬에 대한 안부였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부모나 자식이나 누구든 가족의 죽음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고, 슬픔이다.


최근에는 사람의 수명이 길어져 이전에 70살까지의 삶도 장수라고 했다면 요즘에는 90살이 넘어 돌아가셔도 감히 호상이라는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장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이전에는 장례식장에 조문하러 가게 되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울음소리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탄식소리가 들렸지만 최근에는 그런 소리는 어쩌다 한 번 정도 그것도 귀하게 들을 수 있기에 그런 소리가 들리면 무슨 안타까운 사연이 있나 보다고 추측하게 된다.


이번의 조문 역시 이제 80살이 되신 어머니의 죽음이기에 자녀들의 슬픔이 잔잔히 전해져 말소리나 몸짓 하나에도 조심스러운 장례식이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발인을 마치고 화장터로 가서 여러 절차를 거친 후 마지막 화구로 가는 고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공간이었는데 1번부터 번호가 정해진 작은 방의 유리를 통해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은 통곡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대부분의 조문객들은 함께 슬픔을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옆 방에서 보이는 모습은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인데도 불쾌감까지 갖게 하였다.

상복을 입은 걸 보면 분명 딸이거나 며느리이고, 손녀 들일 텐데 그 공간까지 커피를 들고 서있었다. 분명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이고, 변명하고 생각을 바꾸려 하였지만 전혀 상관없는 나 자신이 서운하고, 화가 나고, 돌아가신 분이 열불 나서 벌떡 일어나지 않겠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치 유리를 통해 남의 일을 구경하듯 대충 보고 있다가 고인이 화구로 들어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커피 어디 있어? 어떤 거야?"라고 소리치는 여자나 상복을 입고 밖에서 커피잔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여자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날이 너무 더워서일 수도 있고, 잠 못 자고 며칠 장례를 치르면서 힘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 순간 단 몇 분 정도는 참아야 하지 않을까 싶고,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마지막 가는 부모의 모습일 텐데 아무런 감정이 없나 싶기도 하고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가정의 모습을 불만스럽게 한참을 넋 놓고 지켜보는데 어디선가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50대 정도의 남자 사진을 하나 가슴에 움켜쥐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서로를 의지해 가는 백발의 노부부 모습이 보였다.

너무 울어서 눈물도 말라버린 듯하고, 목도 쉬어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는데 그 슬픔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수렁에서부터 끌어올려온 듯 깊고, 서럽게 들렸다.

이러다 두 분도 돌아가시겠다고 또 다른 자식들의 탄식소리와 맞물리는 걸 보니 아마도 아들의 죽음을 맞은 부모인 듯한데 두 가정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가 되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그 말이 사실임을 뚜렷이 보이는 노부부의 슬픔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된 듯 누구의 장례와 무관하게 모두 눈가의 눈물을 알게 모르게 닦아내었다.


한 사람의 삶이 끝나고 이제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한 줌 가루가 되는 순간인데 아무도 고인에 대한 감정이 없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끝없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그런 모습과 그때의 내 감정들을 말하며 조금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덜어내 보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감정들로 서운하고, 안타깝고, 섭섭하다.

그러면서 내 마지막 순간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무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다소 생뚱맞을 수 있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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