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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Sep 10. 2020

아무튼, 감성

미치도록 할 말 많으나




할 말이 너무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줄임말 유행어 "할많하않"에 대공감이다.




언젠가부터 나의 넘치는 감성에의 표현이 절반, 그 이상으로 줄었다. 이는 나의 감성적 표현에 맞장구를 칠만한 사람을 산 사람 중엔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점점 굳혀지기 때문이었다. 간혹 글로 만나지만 글은 시시 때때 내게 반응을 주진 않는다. 알아먹지 못하면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경험한 이후론 차라리 마음 깊숙이 감성 따위의 것들을 저장할 만한 방을 여러 개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살짝 알아먹는 이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나의 딸이다.
"엄마 달 봐! 반달인데 너~~~~~~~~~~무 이뻐" 이때 "너~~~~~~~~~~무"가 참 중요하다. 나 이외에 그 누구도 그런 표현 하는 이를 잘 만나지 못했다. 내 말 습관 정도로 아는 사람이 대다수다.
마음을 샅샅이 표현하기에 부족한 언어 습득(?)때문인지 평소 속 숨을 다 끄집어내듯 말하는 버릇이 있는데 글쎄 그걸 내 딸아이가 하고 있는 거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풀 한 포기마다 발을 멈춘다.  쏟아지는 빗속 비 맞는 고양이를 어쩔 줄 몰라하며 바라본다. 밤마다 오늘의 달을 관찰하고 시시각각 감정의 변화를 표정으로 바꿔낸다. 사물마다 자신이 부여한 다른 이름을 붙이고, 쓰라고 강요한 적 없는 일기를 한 바닥 쓴다. 구호단체의 광고 영상이 뜨면 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돌리고 더는 가여워 못 보겠으니 채널을 돌리라고 애절하게 부탁하는 아이다.


10시쯤 서재로 글을 쓰는 게 내 루틴이 되어가는데 그로부터 30분 뒤쯤? 40분쯤? 어김없이 따라 들어와 내 글을 반짝반짝 읽어 내려간다. '너 일곱 살이 이 글을 알아먹겠니'싶어 아랑곳 않고 글을 쓰노라면 예상치 못하는 돌발행동 (한참 글을 읽다가 옆에서 목을 끌어당겨 말없이 한껏 안아주는)으로 당황한 엄마를 먹먹하게 만들어 버리곤 한다.


미친다. 미친다는 말 이 외 다른 말이 달리 떠오르지도 않는다. 내 감성을 꼭 닮은 너에게 다 큰 어른인 내가 몹시 기댄다. 내 마음을 알아먹는 사람이 너니? 내 마음의 전이가 가능케 하는 사람을 그렇게 찾아다니니 하나님이 바로 옆에 너를 주신 거니? 친구도, 책방 사람들도, 남편도, 나의 엄마도 아닌 고작 세상에 나온 지 만 육 년이 된, 내 작은 딸아이가 내 감성을 알아먹고 있다.

아무튼 내 감성은 지나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책이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라는 메시지만 굵게 남는 책이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 그 나물에 그 밥이다"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김기석 목사님의 책, <욕망의 페르소나>에 이런 말이 나온다.
"고만고만해도 나름 나름 개별적인 사람들" 간혹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숨이 쉬어진다.
목사님은 윤동주의 "서시"를 두고,  예민한 감성을 지닌 식민지 청년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라고 소개하신다. 세리의 기도에서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성경구절 한 문장으로 그 사람의 모든 복잡한 구조의 마음지도를 해체하고 부서질 것만 수조 개의 처참한 핏줄을 고루 읽어내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헤르만 헤세.
몹시 끙끙 앓았던 적이 있다. 이게 도무지 무슨 마음이냐고 저장된 방마다의 개수를 늘리고 있을 즈음 그것은 "제2 세계"라고 명명한 이. 그의 모든 작품마다 그 "제2 세계" "제3세계"를 해독해주던 사람. 내 방문을 열어젖히고 이제 거기서 나오라고 손 잡아 준 책. '이 세상에서는 글렀다, 내 마음 읽는 이 없으므로' 체념의 끝을 지을 지음 딱 100년 앞서 나의 방을 모두 헤집고 다니며 해제시킨 이.


내가 헤세의 책을 붙들고 앉아 통곡하며 읽었다고 하니 "그만큼 슬픈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통곡은 몹시 무모한 것이 되어버렸다. 내 생각과 감성을 사이코 아니냐고 농담 삼아 던진 내 어릴 적 친구의 말에서 당신들은 도무지 알아먹지 못하는 <내 마음 따위>에 대해 다시는 입을 열지 않겠다고 오버된 결심을 하기도 했다.

지나치다. 아무튼 나의 감성은.
그런데 그런 내가 싫지 않다.




#Episode

오늘 책방 샘들과 요즘 유행하는 아무튼 시리즈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무튼 식물, 아무튼 요가, 아무튼 양말, 아무튼 서재, 아무튼 떡볶이, 아무튼 메모 등등...
그러다 문득 당신들이 자신의 책을 아무튼 시리즈로 지으면 어떻게 이름 붙이겠냐 하는 말이 나왔고 자신이 가장 자신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하나둘씩 제목을 정해보았다. 아무튼 베짱이, 아무튼 수다...
나는 무얼 하지...
아무튼.... 책방? 아무튼 서재가 있었고 왠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감성?이라고 했다.
그런 책은 사람들이 안 좋아해서 잘 안 팔린다는 의견이다.
재미로만 이야기해 본 건 아니고 정말 언젠가는 섬세하다 못해 질식해버릴지도 모르는 내 감성에의 묘사를 죽기 전에 자주, 많이 남기는 도전을 해 보아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오은아의 <<아무튼, 감성>>
보든 안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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