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몇 해마다 꼭 순천을 찾고 있다. 아마 처음 순천만을 찾았을 때의 기억이 좋아서였을 것이다. 끝없이 갈대가 펼쳐져 있는 순천만을 걷다가 가만히 쪼그려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펄 위로 짱뚱어와 게가 폴딱거리며 다니는 풍경이 낯설고 새로웠다. 둘에서 셋, 어느새 넷이 되어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주고받는 대화들이 좋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좋았던 기억에 덧붙여지는 기억들이 순천만을 더욱 좋아하게 해 주었다.
작년 가을 순천에 계신 주은 작가님과 공간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우연한 시간’이라는 제목의 전시는 작가가 순천에서 지내며 만난 우연한 시간의 기록이었고, 전시 사진 6점 중 4점이 순천의 와온해변이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작가님의 사진을 보고 순천에 바다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게 순천은 곧 순천만이어서 여수 바로 가까이에 순천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바다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 달간의 전시를 진행하며 필름으로 담은 와온해변을 매일 만났다.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 지는 해변의 모습과 해가 모두 진 뒤 붉은 어스름만 남아 있는 풍경이 어떤 날은 쓸쓸했고 어떤 날은 나도 그곳에 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순천만으로만 기억되던 순천에 어느새 주은님이 운영하는 서점인 책방심다와 와온해변이 더해졌다.
가끔 당일치기로 먼 여행을 다녀올 때가 있는데 지난 주말이 그런 날이었다. “순천 갈까?” 한 마디에 오후 3시, 대전에서 순천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달라지는 풍경과 이정표를 바라보며 전시와 워크숍을 위해 주은님이 달렸을 도로의 풍경과 시간을 떠올렸다.
순천에 간 일요일은 몇 개월의 휴식기를 거친 후 책방심다가 다시 문을 연 주의 첫 주말이었다. 6시 마감 전에 도착하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 책방심다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0분. 바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다가 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어린이들 모습에 긴가민가하며 나오는 주은님의 이름을 반갑게 불렀다. 이런저런 소회를 풀기에는 짧은 머무름이었지만 달라진 책방심다의 모습도 눈으로 담고 전시와 워크숍, 제작을 함께하며 어느새 애틋해진 주은님과 포옹을 하고 와온해변으로 향했다.
책방을 나서기 전 주은님이 와온해변에 가는데 ‘우연한 시간’으로 찍어야 한다며 지난 전시 사진이 패키지로 디자인된 우연한 시간 업사이클 카메라를 손에 쥐어 주셨다. ‘그렇지, 와온해변은 우연한 시간이지.’라는 생각이 들어 거절 끝에 기쁘게 받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와온해변을 드디어 만났다. 동해가 익숙한 내게 서해와 남해의 바다는 늘 새롭다. 바닷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해변과 가만히 물속을 바라보면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톡톡 튀는 짱뚱어, 나를 부르는 아이들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풍경 속에 서서 주은님이 수없이 바라봤을 풍경을 바라봤다.
해가 진 뒤 붉은 어스름만 남아 어둡게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점점 사위가 어두워져 가는 해변에 서서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우연한 시간 카메라로 담은 와온해변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하면서, 지금 바라본 풍경 그대로 담기진 않겠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하면서.
(202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