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을 만난 건 고등학교 때 동아리 ‘자아성찰’이다. 그 애는 키가 컸고, 서늘하고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 동성을 만나고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그 애와 친해지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하늘과의 대화’를 하고 글을 썼다. 그때서야 그 애의 ‘깊은 우물’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미국에서 태어나 전남 영광의 본가에서 자라는 동성과 조금씩 친해졌다.
우리는 토요일 오후에 항상 모여서 무언가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심리학자 로저스가 주장한, 인간은 스스로 느끼고 깨닫는 활동을 통해 발전해 간다는 것을 토대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동아리의 지도교사인 최승우 선생님은 단순한 월급쟁이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청년 교사였다. 제자를 잘 키우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고, 헌신하셨다. 우리는 선생님 덕분에 화엄사에서부터 시작하는 지리산 종주를 매년 여름방학마다 했다. 장터목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보았다. 한여름이어도 큰 산은 추우니까 '나폴레옹' 이라는 싸구려 양주도 마셨다.
동성은 원광대학교 교학과에 진학했다. 나는 군산으로 왔고, 우리는 가끔 데모하는 현장에서 만났다. 동성은 긴 대나무에 깃발을 들고 있어서 눈에 띄었다. 나는 이른 결혼을 했고, 미국에서 태어났던 동성은 워싱턴으로 교무님 실습을 나갔다. 숙소에서 교당으로 가다가 야생 동물을 본다고, 네가 보면 정말 좋아할 거라고 엽서를 몇 번 보냈다.
우리 동아리 ‘자아성찰’은 15기에서 끝났다. 우리 최승우 선생님은 익산의 한 중고등학교로 전근 오셨고, 학교를 졸업한 선후배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그때 동성은 교학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젖먹이 아기 엄마였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김제 모악산에서 모이는 날, 동성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날, 동성과 나는 겉돌았다. 너무 잘 된 선배들한테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동성과 나는 일어섰다. 선생님은 따라 나오셔서 아기 돌 때 옷 사 입히라고 돈을 주셨다.
김제에서 군산으로 돌아오는 밤길은 기형도의 시 ‘안개’에서 읽은 안개군단의 모습이었다. 전조등을 켜고 더듬듯이 천천히 가야할 만큼 안개는 짙고 두터웠다. 동성은 빌려 타고 온 ‘식당 이모님’의 차를 조심조심 몰았다. 긴장했으면서도 그 애는 유쾌하게 말했다.
“지영아, 요새 내가 연습하는 곡이야. 신해철 형님 신곡.”
나는 동성이 불러주는 마왕의 신곡을 들으면서 아기에게 젖을 먹였다. 그 뒤로는 아무 일도 아닌 걸로 동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성아, 밥 먹으러 와.” 동성은 익산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직행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밥을 먹고, 우리는 시시한 얘기를 하면서 웃었다. 동성은 피카소 화집이나 이철수 판화집을 선물로 보내주곤 했다.
마지막으로 동성을 만난 건 4년 전이었다. 남들한테는 아무 것도 아닌, 나한테만 큰 상을 받은 적 있다. 우리 최승우 선생님은 완전히 기뻐하시면서 우리 동기들 다 불러서 밥 사주신다고 했다. 다들 사는 게 바쁘고, 수도권에서 전북까지 오는 건 여러 가지를 따지며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마산 원불교 교당에서 근무하는 동성이와 이제는 동기 중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선용이만 불렀다.
“겨울에는 다 쓸쓸해서 갈 데가 마땅치 않다.”
선생님은 정읍 구절초 공원에 우리를 데려가셨다. 곳곳에 녹지 않은 눈이 있었다. 눈을 좀처럼 볼 수 없는 마산에서 온 동성은 몹시 반가워했다. 사실 우리가 자란 영광은 눈의 고장이었다. 버스가 안 다닐 정도로 폭설이 퍼붓기도 했다.
지난 달, 동성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지영아, 네가 올해 책을 책을 세 권이나 쓰는 동안 내가 아무 것도 못 해줬네.” 생물학적인 오빠처럼 말했다. 뭐라도 해주고 싶다면서 주소를 대라고 했다. 20년 전하고 똑같은데, 관심 좀 가지라고 까불지 않았다.
부산의 원불교 교당에서 교무님으로 근무하는 동성은 어묵을 보내줬다. 여러 집이랑 나눠먹어도 될 만큼의 양이었다. 나는 책밖에 보낼 게 없었다. 동성은 책을 잘 받았다고 인증샷을 보내왔다. 그 속에는 낯익은 동성의 손 글씨가 보였다.
영광의 작가. 자랑스러운 벗. 지영아~ 소중한 책 받게 되어서 기뻐. 널 생각하면 항상 유쾌하고 따뜻한 마음이야. 우리 함께 멋지고 귀여운 아저씨 아줌마가 되자. 부산에서 벗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