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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영 Mar 26. 2016

‘81밀리 박격포’ 출신 유아교사 “애들과 숲으로"

매일형 숲 유치원  장정수

“여자 친구 따라왔어요?”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학생들은 정수에게 물었다. 당연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가 들어간 대학은 군산 서해대학 유아교육과, 183명 중에 남학생은 3명이었다. 그것도 반마다 한 명씩 흩어져 있었다. 손유희만 배우는 시간이 있고, 율동을 하는 강의실이 따로 있었다. 교수님이 새로 만든 율동을 가르쳐주면 친구들은 진지하게 배웠다. 정수는 도망 치고 싶었다.    



정수는 군산 남중 다니면서 기타를 배웠다. 교회에서 기타 연주할 사람이 필요하대서 학원에 간 거다. 사춘기 소년 정수는 곧장 기타와 베이스기타에 빠졌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음악 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 친구들이랑 밴드를 결성했다. 학교에서는 음악 연주할 공간을 주고, 행사에 초대 받으면 공연 가라고 수업을 빼 주었다. 



“지도해주는 선생님이 차에 직접 악기와 앰프를 실어서 공연하는 곳까지 날라주셨어요. 그때 저희가 주로 했던 곡이 신성우의 ‘서시’,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 ‘밤이 깊었네’였어요. 저희 밴드의 보컬 하는 애가 노래를 진짜 잘했어요. 공연비도 받았는데 그걸로 악기를 샀고요. 저랑 친구들은 평생 음악할 거라고 생각했죠. 다른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



정수는 백제예술전문대학에 원서를 썼다. 실기시험이 다가오는데, 부모님은 “절대 안 돼. 음악은 취미로만 해!”라고 했다. 완강했다. 정수가 부모님의 마음이 돌아서기만 바라는 동안,  각 대학의 음대 입시는 끝났다. 원서 접수를 늦게 받는, 부모님이 권하기도 하는 유아교육과만 자리가 있었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과에 진학한 것, 정수 인생의 첫 번째 실패였다.  



서해대 유아교육과에는 정수의 소꿉친구 비아가 있었다. 강의실에서 스스럼없이 말 붙일 수 있고, 등·하교도 같이 하는 비아가 있어서 다른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이 애들이 나를 남자로 보겠지’라는 착각에서도 빨리 깨어났다. 그래도 유아교육과에 다니는 일은 힘들었다. 동요에 맞춰서 단체로 율동을 하는 일은 가장 적응이 안 됐다. 한 학기 내내 그랬다.  


 

“1학년 여름 방학 때, 어린이집에서 보조교사를 했거든요. 그때 제가 애들을 엄청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영부영 자격증만 따서 나가면 될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죠. ‘잘 배워야지’ 라고 생각했어요. 유아교육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거예요. 그래도 어린이집 일은 힘들죠. 막판에는 뇌수막염에 걸렸어요. 앓아누워서도 유아교육의 보람을 알게 돼서 좋았어요.”



2학년을 마친 정수는 육군 중에서 가장 힘들다는 ‘81밀리 박격포’에 지원했다. 자대 배치 받고서야 좀 후회했다. 사람이 들고 다니는 무기 중에서 가장 무거운 박격포는 42.5kg. 세 명이서 나눠 든다. 계급이 높을수록 무거운 무기를 든다. ‘경험도 재산’이라는 생각을 가진 정수는 협동을 배우는 부대 생활이 좋아졌다. 힘든 일이 많아서 곱씹을 추억도 많다.  


    

정수씨는 3학년 때 야간대학으로 복학했다. 낮에는 율동 하나도 온몸을 쓰며 하는 유아체육 교사를 했다. 전주, 익산, 군산, 서천, 김제, 정읍에 있는 유치원의 운동회나 발표회, 캠프 를 진행하고 다녔다. ‘최대한 많은 일을 보고 겪자. 좋은 것만 배워가자’는 생각으로 7년 동안 일했다. 대학원에 가서 유아교육을 더 깊게 배우려고, 방통대학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유아체육을 하면서부터 유아기관 설립하는 꿈을 갖게 됐죠. 그러려면,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진짜 현장을 배우고 싶었어요. 그때 어린이집 유아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제가 출근하기로 한 유치원에서 ‘남자니까 오지 말라’고 했어요. 낙담했는데 모교 교수이기도 한 ‘문화 어린이집’ 김신덕 원장님이 ‘유아교육 현장에는 남자가 필요하니까 와!’라고 했어요.” 



2012년 3월, 어린이집 정교사로 취직한 정수씨는 여자 선생님과 둘이서 다섯 살 반 22명을 맡았다. 반 아이들은 정수씨를 ‘어린이집 아빠’로 불렀다. 자연스럽게 여자 선생님은 ‘어린이집 엄마’가 됐다. “교사가 발전하면, 우리 아이들한테 더 좋지요”라는 김신덕 원장은 교사들이 학교 다니는 걸 장려했다. 정수씨도 군산대학교 유아교육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김신덕 원장은 교사들을 존중하는 만큼 요구도 정확했다. 오로지 아이들한테만 집중하기를 바랐다.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교사들은 핸드폰을 쓸 수 없다. 서류정리나 교실청소도 아이들이 돌아간 뒤에 해야 했다. 법인 어린이집이라서 감사 받는 횟수가 많다. 민간 어린이집보다 업무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교사들은 대부분 장기근무를 했다.  



정수씨는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면서 히브리어로 지혜라는 뜻의 ‘호크마’ 교육을 알았다. 놀면서 배우는 공부. 총신대 김정희 교수한테 호크마를 배우려고 2년간 서울을 오갔다. 아동상담사 자격증도 땄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점점 넓어진다는 걸 느꼈다. 어린이집에서 일하면서도, 유아교육 관련 공부를 계속 해나갈 힘이 생겼다.  


“아이들을 데리고 월명산에 다녔어요. 3월부터 11월까지 날마다 1시간씩을요. 제가 원래 숲 유치원이랑 생태교육에 관심이 많았는데 산에 다니면서 확신을 얻었어요. 근데 비 오거나 눈 오면 못 가요. 누리과정 안에서만 해야 해요. 제도권 안에서는 숲 교육을 제대로 하기 힘든 거예요. 저는 온전하게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린이집) 2년 근무하고 사표를 썼어요. 작년예요.”



정수씨는 숲 체험 강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숲 유치원을 돌아다녔다. 처음에 그는 ‘애들을 데리고 어떻게 몇 시간씩이나 숲에서 지내지?’라는 고민을 했다. 전라북도에는 단 한 곳도 없는 숲 유치원. 그 실체와 마주한 순간, 정수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가 가진 교사관이 완전히 바뀌지 않고는 숲 교육은 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정수씨는 “위험하니까 가지 마”라고 아이들을 통제해 왔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도 도와주는 게 당연했다. 앞서서 알려주는 게 교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숲 유치원 교사들은 아이들을 곁에서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아이들한테 “이렇게 해”, “그렇게 하면 위험하니까 안 돼” 같은 지시를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옳은 선택을 하도록 길잡이 역할을 했다. 



“숲 유치원은 아이들에게 위험도 겪게 해요. 낭떠러지가 있잖아요. 거기를 못 가게 울타리를 딱 쳐 놓으면, 아이들은 ‘어? 위험한가 보다’ 하죠. 근데 울타리가 없으면, ‘여기 위험해 보이네’를 생각하죠. ‘내려가면 다칠까?’ 한 번 더 생각하고요. (울타리가) 없으니까 더 많이 생각한 뒤에 행동하죠. <무한도전>에서 하하랑 형돈이가 일일교사로 간 곳이 숲 유치원이에요.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되지 않게 지켜줄 의무는 선생님한테 있고요.”



숲 유치원 아이들은 날마다 숲에 간다. 눈비가 온다고 일상생활을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린란드의 얼음 도시 누크, 며칠간 집을 비우면 눈이 창문까지 쌓이는 곳이다. 거기 아기들은 걸음마 하기 전부터 유모차를 타고 산책한다. 추위를 경험한다. 궂은 날씨도 받아들이며 큰다. 그 아이들은 자라서 유치원 마당에 쌓인 눈으로 이글루를 만들어 논다.    


  

유아교육 사상가 프뢰벨은 ‘어린이들이 숫자나 글자가 아닌 자연에서 뛰놀게 하라’고 했다. <자연, 성장의 밑거름>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숲에서 뒹굴고 논 아이들은 끈기, 창의성, 집중력이 높다. 아이들은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자연에서, ‘함께 한다’는 것을 몸으로 깨우친다. '자연 안에 해답이 있다'는 가치를 알아본 독일에는 숲 유치원이 1천여 곳이나 된다.


 

“무조건 외국의 숲 유치원을 따라하는 건 아니에요. 모든 답은 우리가 옛날에 하던 거에 있다고 봐요. 어렸을 때 개구리 잡고 메뚜기 잡는다고 뭐라고 야단 친 사람 없잖아요. 아이들은 해질 때까지 노는 게 일이었어요. 공부보다 노는 게 먼저예요. 숲 유치원 출신들이 학교생활도 잘 한대요. 사회성과 인성 영역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문제해결 능력도 높고요.” 



정수씨는 군산 곳곳의 산을 보고 다녔다. 그가 어린 시절 뛰놀던 외가 동네 사정동은 도시개발로 마을이 비었다. 동네 뒷산만은 옛 모습 그대로. 그는 청년창업 대출을 받아서 산 밑의 땅을 샀다. 숲 유치원 ‘고센 숲 탐험대’를 지어서 개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너무 큰 모험이야” 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수씨는 흔들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는 매일형 숲 유치원이 십여 곳 있다. 정부지원은 받지 못한다. 지방정부가 70%,  학부모가 30% 부담하는 독일의 숲 유치원과는 다르다. 비쌀 수밖에 없다. 부모가 숲 교육을 확신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보낼 수 없다. 정수씨는 몇 년 동안 아이들과 숲에서 놀면서 ‘모든 교육의 원리는 자연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코메니우스(현대교육의 창시자)의 말을 고스란히 이해했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까지 낙관한다.  


    

숲에서는 교과서를 펴지 않고도 배우는 게 무궁무진하다. 계절의 변화와 곳곳에 깃든 생명을 본다. 자연에서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기다림이 먼저다. 여럿이 함께 해야 놀이든 일이든 잘 풀린다. 현대인은 갈수록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게 어렵다지만, 숲에서는 그게 특별하지 않다. 친구와 함께 가는 교육, 아이들은 숲에서 커나간다.



음악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소년은 숲길 체험 지도사, 유아 숲 지도사를 공부했다. 이십대 시절에 꿈꾼 숲 유치원을 만들어가고 있다. 천막 치고 생태교육만 하려던 계획은 호크마 교육을 만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 중. 5월부터 주말마다 숲 체험활동을 하고, 2학기부터는 오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숲에 가서 오후에 돌아올 거라는 정수씨.  



“숲에서 밥도 먹고 오니까 다 들고 가야죠. 교사 짐이 엄청 많아요. 무거운 걸 들기 위해서, 제가 ‘81밀리 박격포’로 (군대를) 갔다 왔나 싶어요.”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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