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자본 완전 상실의 날

by 배지영

눈의 고장(광주)에서 태어나 눈의 고장(영광)에서 자라 눈의 고장(군산)에 살면서 넘어진 적 없었다. 자빠질 걱정 따위는 거의 하지 않았다. 단신, 그리고 씨름왕(참가자 수 비밀) 출신이라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는 게 내 매력이었다.


오전에 자매님이 토스 미션 수행하자고 우리 집에 왔다. 현관문 앞에서 등산화를 대충 신고는 계단으로 걸어내려갔다. 그대로 아파트 입구까지 가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나는 눈썰매 타는 것처럼 엉덩이와 허리로 계단을 내려왔다. 순식간에 미끄러졌다. 하필 출근하는 아래층 조사장님과 마주쳤다. 창피하니까 벌떡 일어섰다. 괜찮은 척 1층까지 자매님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갔다. 그러고는 자매님이랑 다시 엘리베이터 타고 집으로 올라왔다.


왼쪽 허리와 왼쪽 엉덩이가 아팠다. “뼈가 부러졌다면 걷지도 못하겠지.” 셀프 진단을 자매님과 강성옥씨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정형외과 가기 위해 바지를 갈아입는데 악 소리나게 아파서 왼쪽 다리를 들 수 없었다.


진찰받고 엑스레이 찍었다. 의사 선생님이 뼈 안 부러져서 다행이라고 나처럼 기뻐해 주셨다. 한 닷새 정도는 아플 거라고, 환자한테 왜 누워 있으라고 하는지에 대해 다정하게 설명해 주셨다. 운신 못해서 식구들한테 짐 되면 안 되니까 집에 오자마자 누웠다.


12월 24일 오전 9시 40분, 나는 매력자본을 완전 상실했다. 이제는 눈 밟기도 전에 미끄러져 자빠지는 평범 이하인 사람일 뿐이다.

#눈의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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