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남자들

by 배지영

아침에 내가 먹은 밥은 1933년에 태어난 강호병 씨와 닿아 있다.


자손 많은 집의 장손으로 자란 강호병 씨는 군 복무 중에 맞선으로 만난 고옥희 씨와 혼인했다. 스물다섯 살 새신랑은 할머니를 비롯해 열여섯 명이 사는 본가에서 하룻밤을 잔 뒤에 전방의 부대로 복귀했다. 밥 짓고 빨래하며 대식구 뒤치다꺼리할 새색시 곁에 사랑하는 마음만은 그대로 둔 채.


국방의 의무를 마친 강호병 씨는 집으로 돌아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아궁이에 불 때서 가마솥에 밥을 짓고 나물 무치는 부엌에 드나들었다. 임신한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샘물을 길어다 부엌 항아리에 채워놓았고, 첫 딸을 낳은 아내에게 끓여줄 미역도 직접 준비했다. 집안의 어른들이, 마을 사람들이 무어라 꾸중할라치면 신체 건강한 자신의 몸으로 증명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도 꼬추가 떨어질 일이 없어요.”


아이 다섯을 낳고 분가한 강호병 씨는 구멍가게와 농사를 겸했다. 1년에 열네 번 지내는 제사음식을 아내와 같이 준비했다. 요리책도 없던 시골에서 강호병 씨는 아내와 이웃 여성들의 조리 과정을 곁눈질로 익혀서 무슨 음식이든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수육, 오리주물럭, 전어회, 붕어시래기찜, 냉면은 강호병 씨의 다섯 자녀가 각자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음식이다.


강호병 씨와 내가 처음 인사를 나눈 곳도 부엌이었다. 나는 나물 무치고 찌개 끓이고 생선 구워서 밥상을 차리는 60대 남자의 이야기를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었다. 내가 주방에 가면 강호병 씨는 “치나 봐라. 아버지가 해야 맛있다.” 고 했다. 강호병 씨는 주방에 서서 새우를 듬뿍 튀겨 채반에 담았다. 생선을 손질해 회로 뜨고 매운탕을 끓였다. 나는 요리하는 모습이 보이는 식탁에 앉아서 강호병 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즐겨들었다.


도시에 깃든 역사, 사람들이 기대 사는 들과 강, 그리고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좋아서 소중하게 녹음하고 수첩에 적어두었다. 내 삶에 완전히 스며든 그 이야기들은 인문지리서, 에세이, 동화가 되어 세상으로 나왔다.


봄여름가을에는 농부로, 겨울에는 때로 염부로 살아온 강호병 씨는 시대보다 앞선 남자였다. 허허 웃으며 “남자가 처자식 먹일라고 밥하는 것은 열심히 산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은 노년의 어느 여름날에도 “아이고, 나 곧 죽네.”라면서 주저앉지 않았다. 아내 고옥희 씨가 좋아하는 쌈 채소와 나물, 당신이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차려서 평온하게 저녁을 먹었다.


강호병 씨의 아들 강성옥 씨에게도 주방은 또래 남자들이 ‘가지 않은 길’ 위에 있었다. 결혼하고 맞이하는 첫 식사, 주방에 서서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하는 사람은 강성옥 씨였다. 20세기가 저물던 때에도 요리하는 남자는 사람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젊은 부부들은 우리 집에서 잘 먹고 돌아가는 길에 벌인 부부싸움 소식을 전하곤 했다.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은 강성옥 씨에게 밥상을 차리는 일은 처자식과 시간을 보내는 자기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10년 터울로 태어난 두 아들의 이유식을 해먹이고, 소풍 도시락을 쌌다. 저녁에는 집에 들러 밥을 차리고 다시 일하러 나갔다.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학교와 일터에서 돌아온 아이와 아내가 소파에 주저앉으면 달래서 식탁에 앉혔다. 강성옥 씨가 챙겨준 밥 한 숟가락과 고기 한 점은 시든 마음에 생기와 용기를 채워주었다.


세상은 달라졌다. 옛날 어머니들처럼 끼니 닥치면 본능적으로 밥 차리는 남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마흔 살 넘을 때까지 밥상에 숟가락 한 번 놓아본 적 없다는 강성옥 씨의 후배들도 어느 날 퇴근하고 장 봐서 주방으로 갔다. 요리 레시피 영상을 켠 채 도장 깨기를 하듯 김치찌개, 닭곰탕, 갈비, 섞박지, 열무김치 등을 만들었다. 이제는 모임 날이 되어도 강성옥 씨처럼 식구들의 밥상을 차린 뒤에야 약속 장소에 나온다.

밥하는 아빠를 보고 자란 우리 큰아들도 입시 공부하는 친구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정규 수업 마치면 장을 봐서 식구들의 저녁밥을 지었다. 처음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음식을 따라 하더니 점차 자기만의 개성이 담긴 음식을 만들었다.


봐야 할 웹툰이 있고, 근육 운동도 해야 하고, 게임 레벨도 높여야 하는 큰애는 저녁밥상을 치우고 나서 퍼지지 않았다. 날마다 그날의 식사를 복기하며 레시피 노트를 썼다. 한식 일식 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딴 뒤에는 그렇게 바라던 식당에서 6개월간 알바를 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았지만, 해야 할 입시공부 대신에 하고 싶은 요리에 진심으로 임한 큰애 이야기를 나는 <소년의 레시피>에 담았다.


아침이면 중학생 작은아이가 배 아프다고 시간을 끌다가 스쿨버스를 놓친다. 왕복 45분, 자동차로 데려다 줘야 하는 나는 버럭 하지 않는다. 26년째 남편이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은 덕분이다. 조리학과 졸업을 앞두고 사촌 누나의 디저트 카페 일을 돕는 큰애는 쉬는 날에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지 않는다. 냉장고 안을 신속하게 스캔한 뒤에 갈비를 굽고 중국식 우동볶음을 만들고 과일을 챙겨 여자친구 도시락을 쌌다.


우리 식구가 먹은 모든 밥은 1933년에 태어난 강호병 씨와 닿아 있다.




★ 이 글은 월간 <샘터> 3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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