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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능을 어찌할 것인가

by 배지영

책 말고는 사는 게 거의 없어서 그런 거다. 심사숙고해서 쇼핑하는 걸 다 까먹었다. 한 번 사면 20여 년씩 쓰는 가전제품도 무슨 긴박한 작전 치르듯 단숨에 고른다.


지난해 여름, 20년 넘게 쓴 거실 에어컨은 지인을 통해서 바꾸고, 15년 쓴 식기세척기는 매장 직원이 추천하는 제품으로 구입했다. 지난 금요일에는 텔레비전 사러 가전제품 매장에 갔다가 냉장고값도 같이 결제했다.


“월요일 오후 5시 넘어서 배달해 주세요.”


냉장고에 든 음식을 꺼냈다가 새 냉장고에 집어넣어야 할 강성옥 씨는 판매 직원에게 하나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직원이 확신에 찬 대답을 할 때 나한테만 들리는 배경 음악이 있었다. 빰빰빰 빰~ 베토벤의 ‘운명’ 이었다.

월요일 오전 11시쯤이었다. 사다리차로 옮겨야 하는 냉장고 때문에 배달 시간이 오후 1시 30분으로 당겨졌다고 했다. 나는 일단 거실 바닥에 누웠다. 40살만 어렸으면 발버둥 치며 눈물 쏟을 비보였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냉장고 바꾸는 건 처음이 아니잖아.


딱 20년 전이었다. 나는 CSI 마이애미 편을 보고 있었다(그래요. 뭇여성들처럼 저도 호라시오 반장님을 좋아했어요). 다섯 살이던 강제규는 소파에서 뛰며 경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배달 기사님이 작은 시누이가 결제한 새 냉장고를 가져왔다. 우리 집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스스로 깨우쳤던 강제규 어린이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 어디야? 큰일 났어! 빨리 와!”


이번에는 달랐다. 방문을 닫고 게임에 전념하는 중2님은 이 난국을 꿰뚫어 볼 눈이 없었고, 전주에서 일하는 강성옥 씨도 재깍 달려올 수 없었다.


나는 냉장실과 냉동실에 있는 음식과 양념과 소스를 1시간에 걸쳐서 싹 꺼냈다. 그 많은 식재료를 꺼내놓고 보니 <헝그리 플래닛>이 생각났다. 피터 멘젤과 페이스 달뤼시오 부부는 24개국의 가정집을 방문해서 그들과 밥을 먹고는 일주일치 식료품을 쌓아놓고 사진을 찍었다. 꺼내놓은 김에 나도 따라 해보려다가 귀찮아서 고만뒀다.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설치해준 기사님들이 돌아가고 1시간 뒤에 음식을 냉장고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냉동실은 쉬웠다. 육류, 생선류, 영광 엄마가 보내준 사골국 팩, 봄에 큰시누이가 해준 쑥떡과 후아후아 브레드 깜빠뉴로 분류했다. 문제는 그 많은 양념과 소스를 넣어야 하는 냉장실 홈바였다.


글쓰기 수업할 때 말한다. 100점짜리 완벽한 글을 추구하지 말라고, 다 쓰고 고치면 된다고. 새 냉장고 정리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쓰는 양념도 아니니까 집어넣는 데에 의미를 두자.


“정리의 여왕이네. 완벽해.”


퇴근한 강성옥 씨는 새 냉장고를 열어 보며 말했다. 화요일 한낮까지도 정리 잘했다며 나를 치켜세웠다. 격찬은 사람을 돌게 한다. 나는 친환경 스탠딩 지퍼백을 2시간 넘게 검색했다. 깔끔하게 쓰는 강성옥 씨의 냉장고를 완벽에 가깝게 정리하고 싶었다. 공부하고 연습해서 정리정돈 전문가로 전직하는 건 어떨까. 어제도 그제도 책 안 팔린다고 끙끙 앓았으니까.


내가 꿈을 꾸는 순간부터 정리 잘했다는 강성옥 씨의 칭찬은 쏙 들어갔다. 세상 무심한 중2님도 한 마디 보탰다.


“엄마, 엄마 책상을 좀 봐봐.”


책상은 좀 지저분하다. 하지만 냉장고 정리정돈에 특화된 이 재능을 어찌할 것인가.


#20년쓴냉장고_작은시누이가사준거였어요

#가전은LG

#남편의레시피

#쓰는사람이되고싶다면

#헝그리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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