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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편지

by 배지영

산들도서관 2층 열람실에서 화장실 가는 길목 서가에는 만화책이 있다. 진짜 너무 말도 안 되는 큐레이션이라고 생각한다(도서관 게시판에 글 올린 적은 없음).


오늘 두 번째로 화장실 다녀올 때 깜빡했다. 만화책 서가를 외면하고 걸어야 하는데, 그만 눈길을 주고 말았다.


아아악!!! <은하철도 999>가 왜 있는 거야?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굳센 사람. 원래대로라면 내 자리에 앉아 몰입해서 글 쓴 다음에 옥상 올라가서 바람 쐬고 1층 내려가서 보건소 뒤편에 서서 보리밭 좀 보고 다시 2층 열람실로 와서 글 쓰고 퇴근하면 되는데. 왜 자꾸자꾸 만화책 서가에서 얼쩡대고 있을까.

만지지 말고 딱 눈으로만 보자고 나 자신을 달래고 있는데 손이 먼저 가버렸다. 거의 새 책과 다름없는 <은하철도 999> 2권을 펼치고 말았다.


1권부터 10권까지 있어야 할 <은하철도 999>. 1권이 없었다. 검색해 봤더니 대출 중. 반납할 날짜는 5월 29일. 그러니까 대출 일자는 5월 15일.


대출하신 분한테 무릎 꿇었다. 시리즈 만화책을 딱 1권만 빌릴 수 있다니요. 그로부터 11일이나 지났는데 2권을 빌리러 오지 않다니요. 옛날 도서관처럼 빌린 사람의 이름이 대출 카드에 적힌다면 나는 만화책 1권 빌려가신 분한테 존경을 표하고 싶었다. 내 맘대로 이름도 지었다. 후지이 이츠키(영화 러브레터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 씨.

<은하철도 999> 1권은 어떤가요? 저는 산들도서관 자주 다니고요, 키보드 소리 크다고 가끔 민원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만화책을 쌓아놓고 읽는 편이에요. 저는 후지이 이츠키 씨가 2권 빌리러 오기 전에 10권까지 다 읽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만화책은 1권부터 읽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먼먼 옛날에 저는 <은하철도 999> 만화 영화를 좋아했어요. 일요일 오전 8시에 했거든요. 끝나면 9시. 그때는 다시 보기도 없고 유튜브도 없어서 만화 못 보는 저는 일요일 아침마다 질질 짜며 1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갔어요. 오전 8시 반부터 저녁 6시인가 7시까지 밴드부 연습을 했거든요.


어느 일요일, 저는 <은하철도 999>를 보고 학교에 갔습니다. 음악실 문 열자마자 밴드부 선생님이 지휘봉을 던지고 바로 저한테 달겨들어서 연거푸 뺨을 3대인가 4대를 때렸어요. 저는 시멘트바닥에 고꾸라졌어요(열 살인가 열한 살이었음). 선생님은 저를 일으켜 세워서 머리통과 등짝과 종아리를 셀 수 없이 많이 때렸습니다.


그 후로도 저한테 맷집이 생기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맞으면 여전히 얼굴이 터질 것 같고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고 입 안이 얼얼해서 점심도 먹을 수 없고 눈물도 웃음도 안 나왔지만, 저는 그래도 가끔씩 <은하철도 999>를 보고 학교에 가는 쪽을 택했지요.


후지이 이츠키 씨.

5월 29일에 <은하철도 999> 1권을 반납하러 오실 건가요? 그날 2권을 안 빌려 가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목요일 금요일에는 당진시립도서관 1인 1책 쓰기 수업 준비하느라 바빠요. 하지만 만화책 읽을 시간은 뺄 수 있어요. 하루 만에 1권부터 10권까지 다 읽고 5월 30일에 반납할게요.


후지이 이츠키 씨에게 가닿지 못할 편지를 마음으로 쓴 다음에 저는 제 자리에 앉아서 일을 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저의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샌드위치를 먹더라고요. 저도 먹고 싶었습니다. 퇴근하면서 샌드위치 샀습니다. <은하철도 999> 1권 읽으면서 먹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ㅋㅋㅋㅋㅋ


<은하철도 999> 1권을 빌려가신 후지이 이츠키 씨, 늘 건강하시고요. 저녁도 맛있게 드세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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