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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by 배지영

인간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 어떤 식물과 동물도 이름이 없었다. 모두 호모 사피엔스가 붙여주었다. 다양하고 예쁜 적절한 이름을 주었다. 덕분에 모든 생물이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인간이 없었다면 그 어떤 꽃도 예쁠 수 없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와서 “넌 참 곱구나!”라고 고백했을 때야 비로소 꽃은 예쁜 존재가 되었다. - <찬란한 멸종>, 이정모, 99쪽



르락 카페 근처 운동기구 있는 작은 공원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그날은 여성 두 분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해 떨어지기 전, 두 분은 계속 나를 바라봤다. 양쪽 다리를 번갈아 쭉 펴면서 살짝 멀어지려 하는데.


“예뻐다. 예뻐. 참 예뻐!”

주위를 둘러봤다. 강아지나 고양이는 없었다.


“다리까지 예쁘다. 안 예쁜 데가 없어.”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애기 있어요?”

“짝은 애가 고등학교 1학년이에요.”

“응, 말 안 들을 때다. 그래도 이렇게 나와서 운동도 하고, 참 예뻐. 계속 예쁘게 살아요.”


발목 돌리기부터 시작해서 목 돌리기까지 끝났는데 다시 발목을 돌렸다. 덕분에 두 분의 자기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74세와 72세, 같은 아파트 거주, 자녀들과 손주들 나이, 지금 담가야 장마철에 맛있게 먹는 김치, 젊을 때 섭렵한 갖가지 운동과 취미생활, 피부과 시술까지 싹 알려주셨다.


은파 호수공원을 달리면서 생각했다. 내가 예쁜 이유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제는 아니라서 금방 밝혀냈다. 다 내 재력 덕분이라는 것을.


두 분은 우리 엄마 조금자 씨(77세)랑 비슷한 연배다. 우리 엄마처럼 자녀들한테 예쁘다는 표현을 많이 했을 거다. 5월부터는 딸애한테 원피스를 입히고 반 스타킹을 신겼을 거다. 요새 말로 하면 니삭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절약가. 강썬님이 안 신는 양말에, 배지현 자매님이 가냘프던 시절에 입던 요가 레깅스에, 코로나 시절에 산 티셔츠를 입고 달리는 사람. 하지만 젊은 러너들이 신는 니삭스를 두 켤레 사봤다. 그거 신었더니 애들처럼 예뻐 보였을 거다.


참, 두 분이 내 나이 물어보시길래 다섯 살 깎아서 말했다. 그분들은 어떤 의아한 표정도 짓지 않으셨다.ㅋㅋㅋㅋㅋ

#얼평금지

#씨름왕출신

#장신아니고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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