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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안내자 옥돌 Feb 07. 2024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23.07.19.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나한테 진짜 잘해줘. ‘한강에 가고 싶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더니, 말없이 쏘카를 빌려서 한강으로 데려가는 거 있지. 그것뿐이게? 데이트를 마치면 집까지 데려다 줘야 안심이 된다며, 이 더운 날에도 꼬박꼬박 귀갓길을 지켜줘. 풀린 신발끈은 내가 알아챌 새도 없이 허리를 숙여 묶어준다니까. 신기하게도 그 사람이 묶어준 신발끈은 웬만해선 안 풀려.”

한결 같이 사랑받는 열한 번의 계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신발끈처럼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에요. 사랑 앞에서 누구보다 순수한 그 이에게 저는 종종 짓궂은 장난을 치곤 하죠.

“우리, 서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봅니다. 네가 없으면 자기는 평생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거라며. 아니, 못해도 3년은 당신을 그리워하며 아파할 거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이렇게 고약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질 수 있는 건, 언제나 내 곁을 함께할 인연이라는 믿음 덕분이겠죠.

거짓말 같은 올해의 여름입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드라마도 막을 내린 지 벌써 반년이 흘렀네요. 이별하고 홀로 맞이하는 첫 여름이죠. 더운 줄도 모르고 서로만 있으면 입꼬리가 내려갈 줄 몰랐던 날들이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그럴 수 있죠. 사랑스러운 기억을 꺼내 먹는 건 내 자유니까요. 문제는 그런 순간들이 부쩍 잦아졌다는 겁니다.

사랑에 빠졌던 계절의 내음은 꽤나 강력한가 봅니다. 혼자서도 씩씩한 반년을 보내왔는데, 그날따라 홀로 걷는 귀갓길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더군요. 마치 이 골목을 돌면 집 앞에서 그가 기다릴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있죠.


010-3***-***4. 습관처럼 외우고 있는 여덟 자리 번호를 우다다 입력했다가, 고개를 세차게 털어내며 다시 걷기를 몇 번째.

참, 이 동네로 이사 오던 날도 여름이었네요.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단단히 외우라며 당부했던 ‘도-스빌’ 간판이 보입니다. 이 간판을 죙일 외면서 이삿짐을 옮긴 덕분에 천상길치인 제가 하루만에 귀갓길을 익혔다죠. 물밀듯이 밀려오는 옛 기억들에 힘입어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골목에 그가 서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봅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짧은 행복감을 가져다주기도 하잖아요? 아무도 없는 거리를 마주하면 깊은 한숨보다 기다란 실망을 마주할 것을 알면서도요.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적시고 나면 적적한 기분이 좀 나아질까요. 얌전히 눈을 붙이고 한밤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지도 모르죠. 그러나 저는 얌전한 양반은 못 되나 봅니다.

“오빠 잘 있어?”

‘잘 지내?’는 너무 클래식하다며 몇 번을 고쳐 쓴 회심의 결과물입니다. 끝난 인연에 왜 매달리냐며 친구들에게 단호한 조언을 건네지만, 연락을 해볼까 말까, 어떻게 말해도 찌질하지만 한 문장 더 붙여볼까 말까, 전송 버튼을 누를까 말까, 보낸 메시지를 취소할까 말까… 다채롭게 망설인 시간이 무색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습니다.

“잘 지내려고 하고 있어.”

오랜만에 그에게서 온 메시지 알림을 보니 심장이 어찌나 벌렁대던지요. 어떻게 얻어낸 기회인데 안부만 묻고 시시하게 잠에 들 순 없죠. 그래 오늘이야. 근래 꾹 참아온 마음이 터져나왔는지 내친 김에 전화까지 질러볼 용기가 샘솟았습니다.

뚜-뚜. 떨리는 통화음에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보세요.”

이런 것도 습관의 힘이라 하나요? 한동안 가슴 한 구석에서 맴돌던 저릿함이 스르르 내려앉았습니다. 무슨 일 있냐며, 힘든 일 생긴 것 아니냐며 건네는 말들이 여전히 다정해서요. 그간의 공백을 잠시 잊어버리고 이별이 닥치지 않은 장면으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이제 좀 살만 해.

저번 달까지는 지독하게 힘들었거든.”

그의 목소리는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고 잠잠해진 바다 같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헤쳐나갈 것만 같은 여유만만한 모습이 제가 사랑에 빠진 포인트이기도 했죠.

고작 여름 냄새에 못 이겨 이 사단을 낼 줄 알았다면, 그가 힘들다고 외치던 신호에 한 번쯤은 응답해볼 걸 그랬나 봐요. 질리도록 함께 듣던 <바람의 노래>가 프로필 뮤직에 떠있을 때, SNS에 어두운 흑백 사진이 한가득 올라올 때, 그 사람이 먼저 소심한 연락을 보내왔을 때조차 ‘우리는 끝난 사이니까’라고 되뇌며 답장을 꾹 참았거든요. 괜한 자존심을 부렸던 걸까요? 그때는 여름 냄새가 덜 났던 것 같기도 합니다.

잠깐 붙잡아 둔 여름이 사라져버릴까, 핸드폰을 꼭 붙들고 겨우 한 문장을 완성하는 저와 달리 그의 말투는 사뭇 호탕하게 느껴집니다. 갑작스러운 전 연인의 연락에 아무렇지 않게 수박 화채를 만들고 있다 하질 않나, 어제 아버지가 네 얘기를 한참 했다고 하질 않나, 익숙한 이름들을 쏟아내며 지인들의 근황까지 알려주는 걸 보니 말입니다.

00:59:07

시간은 잘만 갔네요. 예전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우리 관계는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 울컥 올라오는 마음을 삼키느라 몇 마디 하지도 못한 것 같은데. 내심 기대했던 만남의 약속은 끝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지킬 자존심도, 제안을 기다릴 여유도 없으니 “밥 한번 먹자”고 내질러봅니다. 그제서야 당신이 여유로웠던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모르고.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한여름의 열병은 저에게만 찾아왔나 봅니다. 헤어지면 3년은 아파하겠다더니, 당신이 괜찮아져서 다행이라는 대답에 진심은 못 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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