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 이제 브런치 작가야.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빠의 손편지를 받았다.
아마, 유치원에서 부모님의 편지 읽어주기 프로그램에서 받았던 것을 제외하면 스무 살에 받은 편지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인가, 엘레베이터에서 아빠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영어 선생님은 생일 때마다 자식들한테 편지를 써준대. 되게 멋있지 않아? 나도 손편지 받고 싶은데.”
개딸은 자기가 먼저 편지 쓸 생각은 못하고 저런 말이나 뱉어댔던 것이다.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
대학 합격 후 서울로 올라가기 전쯤 부모님께 편지를 한 통 썼던 것 같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지금의 모습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겠지..?)
아빠의 편지에 따르면
그에 대한 ‘늦은 답장’이란다.
서울 집의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오래도록 찾고 있던 유물 편지를 발견했다. 6년 전 1월에 몇 장 끄적이다 만 다이어리 속에 끼워져 있더라. 휴우. 이걸 펼쳐보지 않고서 버렸다면 어쩔 뻔 했나 ~
편지의 전문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줄곧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 한 문장이 있었다.
네가 글을 썼으면 좋겠다.
아빠가 입버릇처럼 꺼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네가 7살 때인가.
제삿상에 올라간 대추를 보고 뭐라고 썼는지 아나?
‘매끌매끌한 그릇 위에 올라가 영혼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라는 표현을 쓰더라.
참 어릴 때부터 표현이 남달랐다.”
어릴 적부터 글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성에 차는 글을 만들어내기 위해 글을 잡고 분투하는 시간만큼은 주위를 둘러보지 못할 정도로 머리를 싸맸지만, 일기장이나 독후감처럼 글을 써야 하는 과제는 일도 아니었다. 정도를 걷는 모범생은 아니었던지라, 안 읽은 책도 읽은 척하는 교활한 글쓰기 스킬도 장착했다.
집에 있는 날이면, 엄마는 어린 나와 동생의 손을 잡고 마을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음껏 원하는 책을 집어다가 읽을 수 있게 풀어두셨고, 귀갓길에는 늘 여덟 권의 책을 빌려 양손 무겁게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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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도 도서관에서 시간을 자주 보냈다.
콩알만할 때부터 나는 어딘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주변 애들을 보며 ‘수준이 안 맞다’고 생각했다.(아주 교만했다.)
내 생각이 향하는 곳은 항시 또래들과 달랐고, 그럴 바에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설 수 있는 도서관을 찾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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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부모님은 지역 곳곳의 백일장을 찾아 나를 데리고 가셨다.
나에게는 백일장이 부모님과 함께 떠나는 ‘소풍’ 같았다.
초록이 우거진 곳에서 돗자리를 깔고 오늘의 주제가 발표되기를 기다렸다가, 커다란 종이를 받아 내 이야기를 써내리는 시간.
한 장, 두 장, 빼곡히 채워 심사 부스에 제출하는 순간은 또 얼마나 짜릿하던지.
그리고 당일, 또는 며칠 후 학교로 날아오는 수 개의 상장들을 받으며 친구들 앞에서 괜히 으쓱한 기분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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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아빠와 둘이서 백일장에 간 날이었다.
아빠도 글을 쓰겠다며 원고지 두 세트를 받아와 마주 앉아 각자의 글을 썼다.
그때였던가,
‘글은 어떻게 써야 하냐’고 아빠에게 물었다.
“글의 핵심은 에피소드야.”
덕분에 나에게는 아빠와 함께한 백일장의 에피소드가 남았다.
너는 표현이 좋고 글 쓰는 재주가 있다.
늘 조금만 갈고 닦으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겠다.
그때는 작가가 무슨 직업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어느 시점이 되면 나도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야 할 테고, 글은 취미로만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뭘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대학생활 동안 무엇을 목표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굉장한 고뇌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also,, 모르겠다 ~~ 직장 밖에서 뭐 해먹고 살아야 해? 나 혹시 평생 사춘기?)
그리고 매일 블로그와 브런치로 기록을 남기는 요즘.
사람들이 내 글은 술술 읽힌대. 막 공감되고 재밌대. 다음 편이 궁금하대.
나를 쓰는 사람으로 길러줘서 고마워 아빠, 엄마.
올해는 꼭 출판을 할 거야. 우리 딸 작가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K-장녀 기질 어디 안 간다...)
아빠, 나 정말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