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아빠의 편지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빠의 손편지를 받았습니다. 초등학생 때 국어 숙제로 받은 편지를 제외하고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인서울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부모님께 오글거리는 편지 한 통을 썼어요. 아마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겠죠? 다시 마주하기엔 참을 수 없이 민망하네요!
그에 대한 아빠의 늦은 답장을 받았습니다.
서울에서 세 번째 이사를 준비할 때였어요. 3년 간 묵은 이삿짐 속에서 오래된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단 하나뿐인 아빠의 손편지, 몇 년이나 애타게 찾고 있었던 거예요. 스무 살에 몇 장 끄적이다 만 다이어리 날개에 고이 접혀있었네요. 휴! 이걸 펼쳐보지 않고 버렸으면 어쩔 뻔 했나 모르죠.
두 장을 빼곡히 채운 편지지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한 문장.
네가 글을 썼으면 좋겠다
아빠가 입버릇처럼 꺼내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네가 7살 때인가,
제삿상에 올라간 대추를 뭐라고 썼는지 아나?
매끌매끌한 그릇 위에 올라가
영혼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라는 표현을 쓰더라.
어릴 적부터 참 표현이 남달랐다.“
애매한 재능의 저주라는 말 아시나요?
딱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백일장 상장, 보고서 잘 써서 받은 A+ 성적이 다 무슨 소용인가요. 쓰는 행위야 어렵지 않은데, 글만 써서 어떻게 벌어 먹고 살죠? 서울에서 보금자리 하나 마련하기도 매일이 벅차요. 애석하게도 제겐 <토지> 같은 대작을 쓸 끈기와 재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너는 표현이 좋고 글 쓰는 재주가 있다.
늘 조금만 갈고 닦으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겠다.
문득 생각이 나요.
도시의 삶을 근근이 살아내다가도, 주말마다 열리는 고향 백일장에서 아빠와 나란히 글을 썼던 기억. 잔디밭에 돗자리 하나 펴 놓고 맞이한 봄바람과 주제가 발표되기를 기다리며 살랑대던 어린 마음. 한 장 두 장 빼곡히 채워 심사 부스에 제출하던 순간은 또 얼마나 짜릿하던지!
언젠가 소풍처럼 떠났던 백일장에서 물었어요.
“아빠, 글은 어떻게 쓰는 거야?”
“글의 핵심은 에피소드야!”
덕분에 당신과 함께한 백일장 에피소드가 남았네요.
작가도 직업이 될 수 있을까?
혈혈단신 상경하고, 앞으로의 밥벌이 걱정에 여념이 없던 날들. 글은 취미로만 써야 한다고, 작가님이란 호칭은 번듯한 직장을 찾기 전까지는 감히 탐낼 수 없는 이름이라 여겼습니다. 연필을 잡은 후로 매일 같이 써온 글들, 해마다 일기장은 늘어가고, 작가의 꿈을 일평생 동경하면서도 말이죠.
‘작가님’으로 불려본 첫 날을 기억해요.
브런치 승인을 받았던 그날.
서너 번은 낙방했을 겁니다. 글은 좀 쓰는 줄 알았는데 얼마나 부끄럽던지.. 아무에게도 떨어졌다 말 못했죠. 5수의 오기로 맞서, 프로필과 심사용 글을 몇 번이고 써내고서야 거머쥔 애증의 호칭입니다. 덕분에 브런치를 비롯해서 여러 플랫폼을 오가며 온라인 세상에 글을 내보이고 있어요. 씀과 발행의 지속. 이걸로도 충분한 작가의 삶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꿈이 생겼습니다. 그냥 작가 말고, ‘출간 작가’로 불리고 싶어요. 언어의 세상에서 읽히고 소통하는 재미를 알아버렸거든요. 더이상 서랍 속에만 잠들게 두지 않을 거예요. 홀로 외로이 옅어지고 싶지 않아요. 세상과 촘촘히 연결되고 싶어요! 안으로 안으로 써오던 것을 바깥으로 꺼내어 글빛을 밝혀보고 싶어요. 어딘가 닮은 우리들을 찾고 싶어요.
브런치를 발판 삼아 새 원고를 다듬고 있습니다.
신년에는 새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아빠, 그리고 엄마!
쓰는 사람으로 길러주셔서 고맙습니다.
2025.09.10
작가는 꿈이 될 수 없다고 믿었던 딸이
다시 작가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