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다랑논과 구들장논의 예찬
다랑논 한쪽에선 뱀이 개구리를 물었는지 "꾸구국 꾸구국" 하는 비명이 들린다. 섬뜩한 느낌에 발밑을 둘러보며 논둑길을 지났다. 숨이 멎도록 후덥지근한 열기가 뭇 풀벌레들의 노래를 늘어지게 하고, 불청객의 발길에 놀라 그쳤다 이어짐을 반복하고 있다.
논둑길 끄트머리. 산비탈을 안고 도는 도랑에는 찔레 넝쿨이 터널처럼 우거져있다. 더부룩하게 자란 넝쿨 아래선 금세라도 무엇이 뛰쳐나올 것 같은 음산한 기운이 돈다. 그 밑 돌 틈에는 아직도 가재들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고...
아버지 새참을 들고 이곳을 찾으면 돌 틈 속의 가재를 잡아 저녁 한나절 가지고 놀 거리로는 그만이었다. 좁은 가재 굴에 손을 넣어 손끝에 딱딱한 껍질이 느껴지면 혹시 집게에 집히지는 않을까 재빠르게 낚아 내곤 했었다.
그곳을 지나 양지바른 산비탈에 이르면 산딸기 넝쿨이 진을 치고 있다. 발갛다 못해 검붉게 농익은 산딸기는 요즘의 하우스 딸기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연의 맛이기에 그 맛의 비교는 산딸기에 대한 모독이다. 새콤함과 달콤한 맛의 조화와 자그만 씨앗이 씹히는 느낌은 공해에 찌든 토양에서 생산된 요즘의 어느 과일과도 견줄 수 없는 신선 과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랑논 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골짜기 논들은 참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마처럼 타진 논두렁도 보이지 않고, 맨 아래 가장 커다란 논이 신작로와 경계를 이루며 양쪽 산을 경계로 골짜기 가득 한 다랭이의 논으로 보인다.
다랑논은 가을을 맞아 멋의 절정을 이룬다. 골짜기 가득한 누런 벼이삭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이란, 마치 황금을 빠뜨린 강물의 출렁임을 보는 듯하다. 다랑논의 구불구불한 논두렁을 한나절 동안 엎드려 치성드리듯 깎고 쳐다보면 방금 이발을 한 아이의 뒤통수를 보는 것처럼 단정해 보인다. 조회시간 맨 뒷줄에 서서 까까머리 친구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 같은 깔끔함이다.
아버지께서는 새참을 가지고 온 나에게
"어떤 농사꾼이 맥고모자( 麥藁帽子 )를 벗어놓고 담배를 피우며 자기 논을 세어보니, 논 한 다랭이가 보이지 않더란다. 아무리 세고 세어보아도 모자라 아하! 이제 한 다랭이는 잃어버렸나 보다 하며 맥고모자를 들고 일어서니 모자 아래 있더란다." 하신다. (맥고모자 : 밀짚이나 보릿짚으로 만든 모자)
뚱 부은 모습으로 논에 새참을 가지고 온 나에게 그런 우스갯소리가 재미있게 들릴 리가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한참 재미있을 텐데 칠월 땡볕 아래 시오리 황토 길을 걸어온다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기에 아버지의 말씀은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께서는 상한 내 마음을 다소 누그러뜨려 준다고 한 말이었을 것인데 ….
나이가 들면서, 다랑논에 모내기와 피사리(‘피’라고 하는 벼처럼 생긴 풀을 뽑는 일)를 해보고 논두렁을 깎아보면서 다랑논은 참 아기자기한 멋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그때 말씀도 새삼 재미있게 다가오곤 했고….
언젠가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던 저녁 무렵, 좁고 기다란 논에서 시간에 쫓기어 모내기 마무리를 할 때 나는 논의 저쪽에서 아버지께서는 논의 이쪽에서 한참을 정신없이 모를 심으며 뒷걸음질 치다 서로 부딪쳐 논바닥에 주저앉았다.
"허! 참! 논이 손바닥만 하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구나." 하신다.
그래서 부자(父子)가 논바닥에 주저앉아 한바탕 웃어보는 일도 있었다. 하루의 피로가 진흙탕에 내동댕이 쳐지는 순간이다.
다랑논은 지루하지 않은 멋이 있다. 모내기를 하여도 허리 아프다 싶으면 한 다랭이가 끝이 난다. 논두렁을 깎아놓고 보면 마치 옆집 계집애 가르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온 옆집 아이의 어설피 타진 가르마처럼 삐뚤거리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랑논은 평지 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기자기함과 여유로움이 있다. 반 마지기도 되지 않는 옹색하리만큼 좁은 크기에도 바위 한 두 개쯤은 눌러앉을 여유가 있다. 그 바위는 복 바위라 불리며 비 오는 날 개구리도 쉬어가고 따뜻한 날이면 잠자리도 앉아 졸며, 메뚜기며 참새들이 사랑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새참 때 막걸리와 초할아비가 된 열무김치. 퉁퉁 불은 칼국수가 어울리는 식탁이 되기도 했던 복덩어리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오직 돈! 돈! 하는 세상. 이제 다랑논은 일손이 모자라니 네 하고픈 대로하라는 식으로 묵어 자빠져있다. 바랭이와 억새풀이 진을 치고 쑥대가 솟아올라 산이 되어 버렸다.
어렵던 시절. 한 치의 땅이라도 일구어 곡식 한 알이라도 더 거두려는 농부의 알뜰함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아내와 전라도 완도 여행을 다녀왔다. '완도에서 한 달 여행하기' 프로그램이 있다는 내용을 접하고 지난 6월에 군청에 확인 후 신청을 한 터였다.
내용은 완도에서 일주일 이상 한 달까지 체류할 경우 1일 5만 원의 숙박비를 지원해 주는 시책이다. 프로그램 참여자로 확정되고 완도에 대한 공부를 했다. 가볼 곳 먹을거리 체험거리 등.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구들장 논이다. 왜 청산도의 다랑논을 구들장 논이라 했을까?.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들을 찾아보고 현장을 가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청산도 구들장 논은 논 바닥에 온돌 형태의 구들장을 놓고 통수로를 만들어 아래 논으로 물이 흐르도록 해 물의 활용도를 높였다. 농작물의 냉해를 막고 섬 지역에 부족한 농업용수를 해결하기 위해 독특한 형태의 관개 체계를(물 대는 방식) 구성한 전통적 경작 방식이어서 세계적인 농업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곳을 둘러보니, 다랑논의 아기자기한 추억과 알뜰하게 가꾸어오던 시절을 떠오른다.
이번 완도 여행에서 다랑논의 추억을 그려보는 시간은 참 행복한 과거로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