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이야기를 하려니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수를 결심했던 때? 수능을 망쳤던 고3 때? 나는 분명 좋은 대학에 갈 거라고 확신하던 중학생 때? 고민 끝에 재수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말했을 시절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스물두 살, 서울에 갓 상경한 새내기는 신입생인데 왜 스무 살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루에 한 번 이상 받고 있었다. 그러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재수를 했다고 답했다. 더 자세히 들어가면
“재수를 2년 하셨나 봐요?”
“아니요, 1년은 대학 다니고 1년은 재수했어요.”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랬더니 이번엔 “전에는 어느 대학 다녔어요?”, “왜 재수했어요?” 등의 질문을 마주한다. 전에는 부산에서 디자인학과를 다녔다고 말했고, 재수를 한 이유는 상황에 따라 달리 말했다.
‘디자인에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이건 아직 친하지 않은 사람한테 쓰는 답변이다. ‘엄마가 디자인을 전공하는 걸 반대해서’ 이건 조금 친해진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재수하기 전 부모님을 설득할 때에는 ‘의대 진학을 다시 도전하고 싶다’ 고도 말했다. 모든 이유가 사실이었지만 어느 것도 재수를 할 만큼 간절한 사유는 아니었다.
재수를 결심하다
진짜 이유를 말해 달라고 해도 아직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방아쇠가 된 사건은 있다. 친구의 인서울 대학 입학이었다. 나와 같은 학원을 다니고 같은 대학을 갔던 친구가 갑자기 인서울 대학으로 입학한다는 것이었다. 수능 성적을 보지 않는 수시 전형에 응시했고 합격했다고 들었다. 그렇구나.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2호선 라인 대학에 가는구나. 부러웠다. 나도 서울에 가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보잘것없지만 서울에 가면 나도 남한테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별것도 아닌 이유로 재수의 씨앗을 마음에 심었다.
그 씨앗이 자라는 데에는 대학을 다니며 회복된 자신감도 한몫했다. 대학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작게는 여러 옷을 입어보며 나의 취향을 찾는 것부터 크게는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까지. 대학을 다니며 나는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고3 때는 수능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니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 고3 때는 나의 최선을 다하지 못했어.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면 나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대학에 가고 싶어.
이런 생각 덕분에 재수할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 확신이 되었고, 나는 고등학교 때 다니던 수학 학원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을 먼저 찾아간 건 당시 아빠가 보증을 서서 큰 빚이 생기는 바람에 부모님은 재수를 지원해 줄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내게 한 말도 있었다.
“선생님, 재수 비용 지원해 준다는 말 아직도 유효해요?”
“그렇지?”
그럼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재수할래요.
선생님은 크게 놀라지도 않으셨고 이유를 묻지도 않으셨다. 다만, 재수를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셨을 뿐이었다. 선생님이 알려준 학원에서 등록 상담을 받고, 선생님 카드로 학원비를 결제했다. 본격적인 재수의 시작이었다.
그때가 아마도 2월이었을 것이다. 나는 김해 사람인데 재수 학원은 부산에 있어 통학 차량을 타고 다녔다. 통학 차량이 집 앞에 오는 시간은 오전 6시 45분.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너무 이르다고 불평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사거리 너머 다가오는 차를 볼 때면 내가 너무 성급하게 선택한 것이 아닐까 겁이 났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떨쳐냈다. 나는 선택을 했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