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살이
대만에 오기 전까지 내가 겪어본 지진을 헤아려 보니... 몇 차례 되지 않는데 인상적인 경험을 꼽아 보자면.. 3차례 정도 되는 것 같다.
아마도 내가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나는 24층 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우리집은 16층이었다. 과학 시간에 배운 지진을 실제로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고, 집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에 집이 흔들리자 내가슴도 마구 뛰었다. 나는 곧장 베란다로 뛰어 갔는데, 내 만화같은 상상 속에서 집이 무너지면 16층이 지면에 가까워졌을 때 뛰어내길 작정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히 공포스러웠고, 나중에 지진이 났을 때는 안전한 가구 밑에 머리를 보호하며 숨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였다. 대학원 박사과정생 연구실은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의 옥탑방 같은 곳에 있었는데, 역사가 오래되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었다. 논문 막바지였던 것 같고, 늦은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역시나 홀로 있었던) 연구실 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아! 이렇게 논문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 건가와... 급히 문서의 저장 버튼을 누르며 기적적으로 살아나면 논문을 계속 쓸 수 있겠군.. 두 가지 생각이 엇갈리며 또 한번의 공포를 느꼈다. 나는 이 지진을 통해 모든 자료의 디지털화를 배웠다. 어지간한 자료는 usb에도 저장하지 않고, 드라이브에 저장하게 되었다.
지진이 잦은 나라인 일본에서 겪은 지진은 한 대학의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였는데... 마침 지진이 난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발표를 하던 그 순간이었다. 꽤나 흔들린 모양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지진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던 바로 그 직후였기 때문에 여행가방 가득 옷도 뭣도 아닌 마실 물을 잔뜩 싸 갈 정도로 지진이 무서웠는데, 해외 세미나에서의 발표가 더 공포스러웠기 때문에 지진조차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집중했던 모양이다. 선배 언니가 지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담대한 발표자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평했는데, 사실은 지진조차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는 것이 맞다. 나는 이 지진을 통해 공포가 다른 공포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2024년 4월 3일 오전 7시 58분(UTC+08, 대만 표준시) 대만 동쪽의 화롄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7.2, 최대진도 6강의 지진이 발생했다. 대만 지진학 센터장에 의하면 1999년 9월 21일에 있었던 921 대지진 이후 25년 만에 발생한 가장 강력한 지진이라고 한다.
건물이 기울어지도 하고.. 대만인들은 'collapse'나 'fallen'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싫어하며 기울어진 거라고 표현한다. 사실 그런 대지진 속에서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저렇게 기울어진 것으로만도 무척 놀랍기는 하다.
타이베이나 타오위안의 가정집이나 상점에서도 물건이 쏟아져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우리집에서는 물건이 흔들린 것을 제외하고는 큰 피해는 없었다. 후에 벽에 살짝 금이 간 것을 발견했는데, 집주인한테 말하니까 비 새는 거 아니면 그냥 살라고.. 대만 사람(우리집 주인은 홍콩 사람이지만)들에게는 큰 일이 아닌가 보다.
그런데 나는 이 시기에 대만에 없었다. 짧은 스프링 브레이크를 이용해 잠시 한국에 방문했기 때문에 실제 이 대지진을 겪지는 않았는데, 한국에서도 대만의 지진이 꽤 크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많은 친척과 지인들의 안부 문자를 받았다. 꽤 오랫동안 연락을 못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한국에 온다고 연락을 하지 못 하고 들어와서 살짝 민망했다. 그리고 대만에서 새로 만든 인연들에게도 미안했다. 역시 말하지 않고 한국에 다녀온 터라.. 이번 지진을 통해 나는 주변 사람들의 살가움.. 그리고 소중함을 느꼈다. 이렇게 날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은데 세상은 얼마나 살만한가. 그리고 큰 지진이 나면 대문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생활수칙도 배웠다. 대문이 휘면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안에 고립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진이 났을 때 어디가 안전한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큰 공원 같은 곳에 나가 있는 것이 좋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길 가다 건물 외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부산물에 부상을 입을 수 있으니 집에 있는 게 더 낫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뭐가 되었든 큰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행스럽게도 지진을 겪은 대만은 놀랄 만큼 평온했고, 나도 평온한 날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4월 22일을 전후하여 여진이 반복되었다. 이제 대충 리히터 규모 5.x대의 지진들은 아... 흔들리는구나.. 이 정도로 무덤덤해졌는데(대만에는 하루에도 느끼거나 느끼지 못하는 지진이 수십번 반복된다) 23일이 되는 새벽 2시경 지진은 6.0이 넘는 규모로 2차례 정도 반복되었다. 흔들리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 건물이 내는 소리인지 땅이 내는 소리인지 그르렁대는 소리가 정말 무서웠다. 마치 지구가 무언가를 토해내는 듯 그르렁대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구에 철근도 박고 공장이나 에어컨 같은 거 가동하고 자동차 타고 다니면서 배기가스 뿜어 대고 하는 인간의 일련의 일상 활동들이 이러한 일상적인 지구의 활동에서 더 큰 피해를 겪게 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원시 시대에도 지진이 나면 나무가 무너지고 누군가는 죽었겠고, 그들도 뭔가 지구에 해 되는 행동을 했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한 더 큰 악행들로 인해 더 많은 벌을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더우면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으니 쓸데없는 다짐이다.
중국어로 지진은 地震(Dìzhèn)이라고 하는데 저 땅 지(地)자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자꾸 '지전'이라고 발음해서 또 중국어 선생에게 수없이 많은 지적을 들었다. 이제 어지간해서는 一個人(yīgèrén)을 듣고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처럼... 언젠간 '디전'도 익숙해지겠지... 아니, 지진은 일상적인 일이니까 발생이나 발음은 익숙해져야겠지만.. 지진 피해는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