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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괴로움의 등급과 형식

기뻐할 만큼 기뻐하고 슬퍼할 만큼 슬퍼하자. 사회가 아닌 자신 기준으로.

by 에이치 H

오늘도 전달되는 부고에 대한 나의 자세

많지는 않아도 친구들 간의 카톡방, 동창모임, 직업 관련 모임에 속해 있다 보니 거의 매일 경조사 메일을 받는다.

조사의 경우 대략 아래와 같이 상주의 슬픔이 등급화되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에 걸맞다고 생각하는 '조치'를 기계적으로 행한다.




직업 관련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설령 그게 부친상이나 모친상에 대한 것이라도 그 메일은 나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별도 메일보관함으로 옮겨진다. 물론 본인상이나 배우자상이라면 부의금을 보내지는 않더라도 대충 이력에서 짐작되는 나이를 계산하여 '왜 이리 빨리 가셨나?' 또는 '무슨 사고가 있었나' 하고 한 번 더 생각해 보게는 된다.




내가 아는 사람이 상주로 등장해도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빙부상, 빙모상 또는 시부상, 시모상보다는 부친상 모친상이 뜨면 나에게 슬픔이 더해지지는 않아도 중요도는 더해진다. 나의 경조사 때 상대방이 한 위로를 부의금이나 조화 그리고 방문여부 등으로 어림잡아 보고 직접 가보지는 못해도 부의금을 준비한다. 물론 어떤 경우는 그런 것을 떠나 여러 사회적 관계에 따른 비대칭적 조문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것을 엑셀로 실제 무슨 계산을 한다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과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야말로 절친한, 예를 들면 중고등학교 때부터 30~40년간 계속 인연을 이어오는 친구나, 인연을 아직 이어오는 대학교 같은 과 친구들 또는 경조사 소식을 주고받을 만큼 오래된 거래처 사장님들과 관련된 부음은 그 중요도가 대폭 올라간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면 잠깐이라도 다녀오려고 하고, 부의금과 함께 조화를 주문하기도 한다. 더구나 부친상이나 모친상이라면 나도 '그 상주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아니면 그냥 요양병원에 가망 없이 오래 힘들게 계시다 돌아가셔서 오히려 상주들은 홀가분해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본다.


물론 친인척에 대한 것이라면, 이는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 때의 기억까지 떠올려서 결정을 해야 한다.



슬픔과 괴로움의 등급과 형식

사람의 목숨은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와 같이 고인이나 상주와의 관계에 따른 적절한 각자의 위로와 조문의 정도와 형식이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이는 우리가 되도록이면 지켜야 할 관례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관례는 사실 슬픔과 괴로움이 등급 매겨지고 형식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등급화되고 형식화된 슬픔과 괴로움이란, 다시 말하면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적당한 지에 대한 기준을 부지불식간에 우리 마음속에 새겨놓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상주 쪽에서 나를 전혀 모르지만 나는 고인을 인터넷 기사를 통해서라도 아는 그런 관계에서 장례식장에 가서 부의금을 내고 절을 하며 슬피 운다면 그게 진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해도 상중에 경황이 없는 상주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 될 수 있고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실종된 딸을 평생토록 찾다 최근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송혜희의 아버님 송길용 님의 장례식에는 가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

또 우연한 기회에 유튜브에서 들었던 의료윤리학 강의가 인상적이어서 인물 검색을 했었고, 그 와중에 접한 "네 이름을 지운다"라는 솔직히 읽어 내려가기가 힘들었던 시를 쓰신 신좌섭 교수의 장례식에도 잠깐이나마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조문을 갔다가 무슨 관계냐라는 질문이라도 받는다면 딱히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요즘 흔히 말하는 인터넷 보다가 알았다고 하는 것도 좀 겸연쩍고 실례되는 답변이 될 것 같았다. 또, 아마도 내 마음속 한편에는 일면식도 없는 고인을 조문하는 행위가 그들의 죽음에 대하여 내가 가져야 할 슬픔의 등급이나 형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등급 매겨진 슬픔과 괴로움 때문에 더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운 차려서 일어날 수도 있는데, 어쩐지 그런 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주변의 눈도 의식이 되니 슬픔과 괴로움을 더 연장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반대로, 너무 마음이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 죽음에 대한 애도는 1 달 혹은 1 년이면 충분하다는 사회의 이목 때문에 무리하게 괜찮은 척하고 눈물도 못 흘리고 자신을 더 몰아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영화 '해피홀리데이'에서는 손자손녀들이 해변에서 갑자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시신을 뗏목에 실어 불을 붙인 후 바다로 떠나보낸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어감도 무서운 '폐륜적' 행위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할아버지가 가장 원했던 마무리였을 것이다. 또 내가 언젠가 갔었던 대대로 독실한 기독교신자 집안의 장례식장에서 "우리 아버님의 천국 입장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상주인 지인이 웃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나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등급화하고 형식화하고, 디테일을 삭제하여 패턴화 하고 유형화함으로써, 우리는 문제에 대하여 효율적이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사실 인류가 지금까지 생존한 것, 진화한 것, 눈 부신 현대문명을 이룩한 것은 거의 대부분 그러한 구분과 개념부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등급화된 슬픔, 형식화된 괴로움을 넘을 용기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힘들지는 않은가?

자신의 슬픔과 괴로움에 등급을 매겨 극복할 수 있는 슬픔과 괴로움을 연장시키거나, 반대로 충분히 슬퍼하거나 위로받지 못하고 다시 세상에 나와 가슴의 멍이 깊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흔히 드라마에서 자식을 먼저 보내고 그 슬픔에 젖어 평생 술에 빠져 사는 것이 마치 자식의 죽음에 대한 부모의 표준적인 수준의 애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 형식 즉, 조선시대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생활하는 것을 다시 계승한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등급과 형식을 넘어서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하고 위로하고, 또한 일찍 기운이 나면 남의 시선이나 나의 저 의식 밑바닥의 고정관념이 어떻건 일어나는 것이 진정한 슬픔과 괴로움의 극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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