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는 달라도 내 자식인 대장균에게...
바이러스는 숙주가 없으면 번식하거나 생존을 지속할 수 없으나
박테리아(세균)는 적절한 환경에서 영양분을 공급하면 숙주 없이 혼자서도 잘 살고 번식도 한다고 한다.
대장균은 말 그대로 대장에 주로 서식하는 있는 세균이다.
대장균은 대장표면에 붙어서 내가 먹은 음식물 중에서 분해되지 않고 대장까지 도달한 식이섬유 등을 분해하여 영양분을 얻어 생존한다.
대장균이 나에게서 영양분을 빼앗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면역물질의 대부분은 바로 대장에서 생성되며, 대장균도 역시 그에 기여한다.
즉 대장균 같은 장내 세균이 없었으면, 또한 그들이 이루는 생태계인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이 건강하지 못했으면 나는 아마 코로나나 기타 질병으로 인해 훨씬 큰 위험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내가 종종 건강보조식품으로 먹는 무슨무슨 바이오틱스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내 몸 안의 장내 세균의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장과 뇌는 소위 장뇌축(Gut-Brain Axis)으로 연결되어 있어 뇌가 장의 기능을 조절하기도 하지만, 장의 문제가 알츠하이머, 파킨슨 등의 뇌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자가면역질환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 대장균을 비롯한 장내 세균의 정상적인 생존과 활동이 나의 몸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결국 내가 대장균이라고 부르는 내 안의 생명체는 내가 먹은 음식을 빼앗아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없으면 내가 존재하지 못할 만큼 나에게 고마운 역할도 한다.
그러다 대장균이라고 불리는 내 몸속에서 키운 생명체를 똥으로 배출하고 시원하게 변기물을 내려 이별을 하지만, 나는 아무런 미련이나 가슴아픔이 없다.
자식은 엄마의 몸 안에서 엄마가 먹은 음식물에서 영양분을 얻어 자라고 10개월이 지나면 엄마 몸 밖으로 나온다. 자식도 대장균과 같이 엄마 몸속에 자란 생명체이나, 대장균과 달리 자식의 태명이 개똥이건 심지어 대장균이건 상관없이 그 자식은 부모의 절대적인 희생의 바탕 위에, 일방적인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커간다.
혹시 대장균도 내 몸에서 배출되자마자 현미경으로 찾아내서 영양분을 공급해 주고 애정을 쏟으면 자식 같은 마음이 들까.
들겠지...
달팽이 새끼도 키우다 보면 정이 들고, 메추리도 부화시켜 며칠 보면 정이 들던데...
또 사람들이 흔히 징그럽다고 하는 온갖 파충류도 애완동물로 들여 키우면 정이 붙는다고 하던데...
자식을 내 몸으로 낳은 적이 없는 남자인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 몸에서 빠져나가 아무런 주목도 못 받고 죽어갈
내가 키우고 내게 좋은 일을 해준 대장균의 죽음을 조금은 애도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