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이 ‘내가 얼마나 귀하게 컸는데, 감히 나한테 이래?’로 이어지면 좀 편하게 살 수 있었겠으나(아닌가?), 나는 이 지점에서 ‘나는 왜 이렇게 못났지?'라는 자학의 늪으로 빠져 버린다. 염병할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지?” 말을 자주 했던 사람에게 갑질 당할 때가 많았으므로. 이 원망 섞인 의문을 밖으로 내뱉는 사람의 의도에는 '난 이런 사람이니, 네가 참아'라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바람을 타인에게 말하는 사람은 되기 싫다.
하지만 자학만 하며 우울과 불안을 키우는 상황만은 줄이고 싶다. 우울과 불안은 약으로 치료 중인 상황에서 더 병을 키워선 안된다. 또한 나를 화나게 하는 이들의 말을 모두 신경 쓰기엔 한정된 시간 안에서 내가 돌보고 챙겨야 할 더 소중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내가 상대방에게 무례한 행동을 당할 때 나에게 화살을 돌리지 않고, 상대방이 그 행동을 하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거의 하다 빡쳐서 포기하지만, 시도는 한다는 거다.) 도라이 소시오패스 아닌 이상에야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나를 긍정으로 증명할 수 있는 행위에 몰입한다. 운동과 글쓰기가 그것이다. 나는 일주일에 6번 운동하고, 주말마다 글을 쓰며 도시를 산책한다. 9to6 회사생활을 하며 글쓰기와 운동을 꾸준히 하는 에너지가 있다는 점에 셀프 칭찬한다. (미라클 모닝 하는 사람이 보면 웃겠지만.) 그럼에도 가끔 ‘이렇게까지 애써야 하나? 내 글쓰기가 결국엔 내가 못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행동 같은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 서글퍼지나... 생각을 멈추자.
상대방의 화나는 말과 무례한 행동에 '뭐래 븅신' 하고 넘기는 내가 되고 싶다. 나와 일,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신경 쓰면 해가 되는 부분만 도려내고 싶다. 그러나 분리가 어려우니,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 두 번 빡칠 거 한 번만 빡치자. 내가 못났나 자학하지 말고 '왜저래, 쇠질이나 하자'에서 끝내자. 불안과 우울함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빡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