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크한 세 멤버(어머니와 아들 둘) 7박 8일 크루즈 여행
아침에 일어나니 배는 이미 멋진 항구에 도착해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운치가 있다. 휴대폰도 안 터지는 워낙 오지를 돌다 보니, 이 정도 타운이면 대도시에 온 것 같다. 일단 차가 보이고 사람이 보이면 반갑다. 복잡한 서울을 생각하면, 와아... 같은 세상에 이리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에 잘 적응하고 있는데, 서울로 돌아가면 또 금방 그 복잡함에 잘 적응하겠지? 역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다.
이곳 케치칸은 크루즈에서 근무하는 크루들이 좋아하는 도시란다. 배가 정박한 가까운 곳에 월마트가 있어 잽싸게 뛰어가서 쇼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양말 등 생필품을 구입하는데, 본국에 가지고 가면 제품의 질이 좋아 아주 인기라고 한다. 여기 서빙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동남아시아인들 같다. 시즌에만 이곳에 와서 일한다고 한다.
출항 후 처음 맞는 비다. 서울에서부터 열심히 챙겨 온 비옷을 입을 수 있어 오히려 쾌재다. 신나게 챙겨 입고 배를 벗어났다. 상점들이 즐비하다. 큰 배 두대가 정박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내렸으니 상인들은 꽤나 즐거울 것이다. 케치칸의 유명한 스폿은 크릭 스트릿(Creek Street)이다. 이 곳은 계곡에 집을 짓고 살아온 히스토릭 헤리티지 타운이다. 물 위에 집이 있다 보니 얼핏 보면 그 모습이 동남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센스 있게 예쁘게 페인트 칠한 세련된 집들과 깨끗한 환경은 이곳은 동남아가 이니라 미국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크릭 스트릿은 배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들다 보니 이제 유명 명소가 되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비즈니스가 생기기 마련이니, 이 곳의 모든 집들은 기프트샵, 연어 샵, 식당이다. 그중 치누크 컴파니 (Chinook Company)라는 스토어가 있었다. 홈웨어, 기념품, 의류 등을 알래스카 콘셉트로 만들어 파는 곳이었는데 디자인 센스와 질이 아주 훌륭했다. 주인들 차림새가 세련된 것으로 보아 도시 물 먹은 분들이 알래스카로 와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부피와 무게가 부담 없는 버터 스프레드와 망사 가방을 구입했다.
크릭 스트릿을 돌아 나오니 시골 동네 서점이 눈에 뜨인다. 작은 마을 서점은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따듯하고 평화롭게 만든다. 이 서점도 어김없이 그랬다. 그리고, 눈을 파고드는 유리창에 붙어 있는 세 단어! Eat, Sleep, Read. 아! 멋지다 이 서점. 보는 순간 이 쉬운 세 단어의 나열이 내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서점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던지는 첫 번째 말이 '먹으시오'다. 멋지지 않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서점은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어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 '먹어라'는 식당이 할 말이었을 게다. 그런데 이곳은 먹으라고 먼저 얘기한다. 두 번째 메시지는 '주무시오'다. 먹고 자라고 한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책을 읽으라고 한다.
자고 먹는 시간도 아깝게 여기며 책을 봐야 한다는 경쟁 문화에 찌든 도시인에게 이 메시지는 행복하고 당황스러운 역설이다. 그렇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많이 알아 '난 척' 또는 ‘앞서 가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자기 위한 것이다. 이 서점을 지나는 몇 발짝의 순간이 이렇게 색다른 생각을 하는 행복한 기회를 줄 줄이야. 이런 것이 여행의 맛이다.
계속되는 마을 산책 도중에 자선 기부 샵(Thrift Store)을 발견하고 몇 가지 소품은 1달러 대에 득템하고 귀선 했다. 한국에서는 비싼 서양 엔틱 소품들이 이곳 중고샵들에서는 정말 싸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가게나 기타 이런 중고가게들이 있지만,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신상’을 선호하니까. 난 중고가 좋은데... 중고 물품에는 신상에는 없는 시간이 만든 질감이란 것이 느껴진다. 인간은 취향은 다양한 것이니 개취 존중!
항구 앞 기념품 아웃렛 스토어에서는 마그네틱과 사진 프레임을 구입했다. 크루즈 여행의 처음이자 마지막 쇼핑이었다. 이 사진 액자는 이번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의 기억 저장고가 될 것이다. 여행 때마다 지역을 상징하는 사진액자를 구입한다. 귀국 후 사진을 넣고 볼 때마다 기억이 새록새록 소환되어 행복해진다. 귀선 도중 발견한 물고기 모양 벤치이다. 항구라는 공간의 맥락과 자연스레 어우러져서 보는 이가 즐겁다. 이름 모를 센스쟁이 목공 아저씨가 잠시 눈을 즐겁게 해 주셨다.
승선하고 6층 객실로 돌아오는 중에 있는 렘브란트 그림이 있다. 실제 유화 물감을 이용해 모작(Re-Production)을 해놓았다. 그래서 물감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다. 프린트보다 훨씬 격조 있어 보인다. 이 배가 네덜란드 것이다 보니 렘브란트를 자국 문화 마케팅의 일환으로 사용한 것이다. 내셔널 마케팅... 나름 디테일이 있네.
오늘의 점심과 저녁식사도 멋지게 마무리했다. 특히 오늘 저녁식사는 갈라 디너로 진행하였다. 스타터,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 디저트로 이어지는 풀 코스 식사를 했다. 대게 다리도 주문해서 먹었는데 추가 29불에 꽤나 괜찮은 양의 대게 다리가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오다 보면 복도 공간에 스튜디오 장비를 차려놓고 포토그라퍼가 촬영 서비스를 하고 있다. 물론 유료이겠지만, 특별한 이벤트로 많은 가족들이 촬영하는 모습을 보았다. 언제 챙겨 왔는지 온 가족이 근사한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즐겁게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보기 좋다. 흥겹고 즐거워 보였다. 돌아와 객실 문을 여는 순간... 앗! 수건이 원숭이가 되어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와. 거의 오늘 밤이 크루즈 서비스의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이 아닌가 싶다. 저 수건은 도저히 쓸 수가 없어 그대로 달아놓고 쳐다만 보았다. 타월 원숭이와 함께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