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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렐레팔렐레 Feb 05. 2023

영웅본색과 색계

종심을 향하여...

너의 진심을 보여 달라는 팝송 'Ture Colors'나 홍콩영화의 '영웅본색'이나 '색계'는 결코 Color를 이야기한 영화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이나 성격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천차만별의 컬러는 세상만사와 닮아 있다. 어쩌면 그렇게도 닮아 있는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인간만사와 닮아 있는 색에 대한 표현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각기 다른 10인 10색이나 각양각색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나는 다름을 이해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불혹과 지천명을 거쳐 '이순'이 되니 공자의 말씀대로 귀가 순해져서인지 빨강 기질의 본색 본능을 가진 내가 예전 같으면 버럭 화낼 일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그렇다고 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도 끓어오르는 열기를 다스리며 각양각색의 다름이 충분히 이해가 될 뿐이다.  


굳이 '공자'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순'의 나이가 되니 저절로 화가 다스려진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주머니는 열라'고 하더니 그대로 하니 세상 편하기 이를 데 없다. 색으로 보면, 태어난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첫 관문이니 하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양은 '탄생'의 축복으로 빛을 만난다. 학문에 뜻을 둔다는 10대 중반의 '지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색깔(노랑)이 생긴다. 설렘으로 지학에 뜻을 두는 나이인 것이다.


'약관' 20세가 되면, 봄철 새싹이 돋아나듯 인생의 꽃이 피는 '약관'의 청춘(靑春)이 된다. 그래서 '약관'은 희망을 품는 초록이다. '이립'에는 이상을 실현하는 파랑이다. 나이 30을 의미하는 '이립'의 파란색 연상이미지와 같이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한다. 나이 40이 되면, 사물의 이치를 깨달음으로 주의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주장이 확고히 한다는 '불혹'이 된다.


하늘의 뜻을 깨닫는다는 나이 50의 '지천명'은 보라와 같다. 나이 50이면 하늘의 뜻을 알고 삼라만상이 하늘의 원리를 따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이해할 수 있나이가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담기보다는 내어주고, 남의 말에도 거슬림이 없이 귀가 순해진다는 나이 60의 '이순'이 된다. 궁극에는 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에 도달하게 되는데, 주위에 보면 종종 나이 70의 '종심'이 되어서도 욕심을 부리거나 아집이 강한 이들을 보게 되는데 참으로 불편하기 그지없다.


삼라만상은 색 없이 태어나 색을 만들어 가는데 생의 반을 소비하고, 다시 색을 버리는데 나머지 생의 반을 소비한다. 그러나 인간은 색을 만드는데 3년이면 충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학과 약관'의 나이에는 자기 색이 너무 강해 타협을 모르고 색깔대로만 행동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립과 불혹'의 나이가 되면, 자기 색을 버릴 수는 없지만 서서히 자기 색을 감추는 절제가 가능해지기 시작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기 때문에 포커페이스의 지혜를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위에 보면, '지천명'이나 '이순'이 되어서도 자기 색을 다스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추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색을 버리거나 다스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서는 모든 색을 다 버리고 백골이 되는 순리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색깔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다. 그래서 젊음은 색깔이 있어야 하고, '종심'에 가서는 자기 색깔을 버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중용으로 가야 한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중용의 무채색(Gray Scale) 의상을 입는 것도 이 같은 이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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