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요? 백조일 걸요!!
남다른 것이 괴로움의 시작일까? 뛰어날지라도 남다르다는 것은 공감에서의 소외,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물리적 집단에서의 소외와 연결된다. 그 때문에 무엇이든 남다른 사람들이 자기 존재에 대하여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그들은 남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보통이 넘는 그 재능을 결코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뛰어난 것을 과시하는 것보다 남과 비슷한 상태로 눈에 띄지 않고 잘 지내는 것을 더 욕망하는 경우다. 물론, 과시적으로 자랑하는 것을 즐길 수도 있고, 반대로 자랑질이 먹히지 않는 것에 분노와 실망의 경우도 있다. 그런데 양 극단에 있는 두 가지 면은 비슷한 점이 있다. 남과 다른 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자신의 뛰어난 면을 숨길 경우, 거짓 자아로 살아가게 되고, 진짜 자아는 소외된 채, 진짜 자아는 삐쭉삐쭉 튀어나오려고 한다. 그렇게 억눌린 진짜 자아가 엉뚱한 방식으로 튀어나오면, 본인도 수습 불가, 상대에게는 황당한 일이 되고, 남다른 모습이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던 방식으로 드러나고, 관계는 꼬이고 정말로 소외되는 일이 반복된다.
아름다운 이미지, 감미로운 소리, 황홀한 쾌감, 좋은 향과 맛과 같은 기분 좋은 정보들로 감각을 가득 채우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정신적 과잉 활동인은 언제라도 생을 만끽할 준비, 지저귀는 새소리와 석양에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p.38)
크리스텔 프티콜랭,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2014, (주)부키
자기의 신념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도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세계관을 남들에게 적용하지 않는 걸로 충분하다. 이상주의자들은 자기 다운 모습을 지키면서도 현실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p.146)
크리스텔 프티콜랭,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2014, (주)부키
진짜 자아를 끝까지 숨길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은 끝내 거짓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 거짓 관계에 무슨 별 볼 일이 있을까? 진짜 자아의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남들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까지 공개하라. 그것이 자신에 대한 존중이 된다. 세상 모두가 똑같을 수 있을까? 모두가 다르다. 좌뇌형 인간이 많다고 해도 100%가 아니라 70-85%다. 감상적인 우뇌형 인간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15-30%는 된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정보를 수신한다. 알다시피, 우리 중에는 가는 귀가 먹은 사람도 있고 시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현실을 똑같이 지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라는 한 개인이 세상을 아는 방식은 유일무이하고 주관적이다. (p.22)
크리스텔 프티콜랭,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2014, (주)부키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에게 필요한 첫 단계는 스스로 수용하는 것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지 않는 것이다. 뛰어나든 모자라든 그건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그저 남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먼저 빛을 비춰라. 자기 자신조차 소외한 진짜 자기의 모습을 이제 마음속 깊은 독방에서 꺼낼 차려다. 그리고 갓난아기를 보호하듯, 비판과 비난보다는 사랑과 격려를 부어주자. 자기 자신이 할 일이다. 마음속에 소리치는 검열관을 내몰고 마음속에 다정하게 아이를 키워줄 보호자 한 명쯤 마련해 두자. 남의 비판과 비난은 나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저 행위와 상황에 대한 것이니 곱씹을 필요가 없는 일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강박에 빠진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큰 고민거리이기 때문이다…. 실패와 거부에 대한 두려움은 갈수록 커져만 간다. 자존감이 낮으면 새로운 공격을 이겨 내고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항상 긴장해 있고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몹시 피곤해한다……두려움과 피로는 감정을 악화시키고 부적절한 행동을 낳는다. 차츰 공격적이고 불평이 많은 사람 혹은 허세가 심한 사람이 될 것이다. 정말로 사소한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도 한다. 스스로 고립되고 자기 안으로 침잠한다. 도움을 요구할 수도, 스스로 회복할 수도 없다. 매사에 객관성이 사라진다……의욕이 차지해야 할 자리까지 실패와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잡아먹는 것이다. (p.119)
크리스텔 프티콜랭,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2014, (주)부키
뛰어난 사람이 거짓 자아로 무장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맞추며 살면, 이기주의자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휘둘리기보다는 고독을 선택하라. 친절과 사랑을 베풀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마음을 주는 것에도 한계를 그어라. 모두에게 같은 정도의 친절과 사랑을 줄 필요는 없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라는 말을 연습하라. 모든 것을 상대에게 허용할 수는 없다. 내 것을 요구하고, 남의 제안을 거절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사람 좋은 노릇을 모두에게나 하는 것은 집안에 모든 물건을 들여 두는 것과 같다. 버릴 것을 버려야 진짜 쓸 만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을 닫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지만 여러분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자신의 친절과 호의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의 친절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이제 수동식 전환이 필요한 때다. 친절과 호의는 그렇게 수고를 들여 나눠 줄 가치가 있다…. 간단하지만 나의 진정한 자아가 존재할 자리를 만들어 주는 이 말을 잊지 말자. “미안하지만 안 되겠는데!” 이것이 자기주장의 첫걸음이다. (p.161-162)
크리스텔 프티콜랭,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2014, (주)부키
사랑이 넘치고 에너지가 넘치고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할지, 생산적인 활동을 찾고, 매일 운동을 하고, 사랑을 쏟아부을 대상을 제대로 선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의감을 행하고 싶을 때, 모두에게 내 정의감을 강요하는 것은 상대에게는 그것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내게 정의인 것이 상대에게는 별 볼 일 없는 가치일 수도 있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이 되기도 한다. 내 의견과 상대의 의견을 맞추어 나갈 수 있는 여유와, 함께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를 끊어내는 융통성도 필요하다. 모두와 잘 지내고 모든 관계를 평생 같이할 수는 없다.
진정한 자아는 자신이 경험하는 감정과 욕망이 정말로 자기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 다시 건강해진다. 지금의 잠재적 우울증을 극복하려면 금지되고 억압된 감정이 다시 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있도록 풀어 주어야만 한다. 인간은 자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내면의 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을 끌어낸다. 여러분은 슬퍼할 권리, 낙심할 권리, 남에게 폐가 될까 봐 마음 졸이지 않고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다. 위협을 느끼면 무서워하고 존중받지 못하면 화가 나고 이해받지 못하면 슬퍼지는 게 정상이다. 여러분은 차츰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그리고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거부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p.138-139)
크리스텔 프티콜랭,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2014, (주)부키
만일 내가 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것 같다면, 그런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라. 반복해서 말하듯이 모두가 같을 수 없다. 남다른 자신을 수용하고 존중하는 것, 그러므로 거절할 것은 거절하고, 부탁할 것은 부탁할 수 있고, 자신의 진짜 자아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자기 자리를 찾는 길이다.
매우 부드러운 책, 아이를 달래듯 따뜻하게 독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책이다. 당신은 지금 그대로 괜찮다고, 그러니 당신 자신을 수용하고, 제대로 드러내라고 말하는 책이다. 역시 책복이 많은 나는 또 이렇게 엄마처럼 포용하는 책을 만났다. 누군가, 자신의 특별함을 특이함으로 느끼고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하기보다는 무작정 무시하고 숨기려고만 하면서 꼬이는 관계 속에서 고투하고 있다면, 먼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그것이 자신과 타인의 자리를 찾는 길이라고 거듭 말해주고 싶다.
표지 사진 출처 : Photo by Trevor John William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