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두 번째 탈스테로이드
아토피가 도진 것이 자랑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고 있다. 사실 피부에 드러나는 병은 숨긴다고 될 일도 아니다. 한 번 보면 알 것을 숨기고 말 것도 없다. 아토피 때문에 디톡스를 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매일 그림을 그리던 때가 있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던 시기였다. 어쩌다 보니 매우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는데, 조직문화는 보수적이고 일은 나와 맞지 않는 보직만 줄줄이 부여받게 됐다. 그만두자니, 임용까지 들인 수고와 시간이 아까워서 겨우 출퇴근을 하던 때였다. 그때 내게 해준 선물이 매일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간단한 그림이었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작은 드로잉북에 연필로 나무 기둥을 그렸다. 어떤 날은 풀도 그리고 새도 그렸다. 나무 기둥의 질감과 옹이까지 표현하다 보면 그림은 점점 짙은 색이 되었다. 색이 칠하고 싶은 날은 가느다란 색연필로 그리고 칠했다. 글은 내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면, 그림은 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니 안전하면서도 더욱 솔직했다. 글을 쓰다 보면, 누군가가 보면 큰일이 날 것 같아서 일부러 피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림은 어떻게 그리더라도 누군가와의 자잘한 사건을 폭로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는 논리적인 생각을 어느 정도는 해야 하지만, 그림은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글쓰기는 그야말로 내 마음을 읽어 내려가는 시간이다. 글을 쓰는 것은 마음의 산책과 같다. 두 다리로 걷고 두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걷는 산책이 내 마음을 정돈하듯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백지를 가득 채우고 또 채우고 또 채우며 마음을 술술 풀어내는 행위는 마음속에 엉켜 있던 생각을 글로 가지런히 정돈한다.
디톡스를 시작하면서 글쓰기를 자주 하고 있다. 몸과 마음과 환경은 닮아 있는 것일까? 아토피 치유를 위해서 카페라테 대신 물과 차를 마시고, 달콤하고 끈적끈적한 케이크와 과자 대신 담백한 찐 옥수수나 채소를 먹고, 양념한 고기 대신 살코기를 구워 먹으면서 몸무게가 많이 줄었다. 최근 몇 주만에 빠진 몸무게가 지난 일 년 동안 다이어트를 한다고 뺀 몸무게와 비슷하다. 몸에 쌓여 있는 지방과 노폐물이 빠지면서 마음도 정돈을 하고 싶어졌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생각날 때마다 노트를 꺼내 글을 적고, 노트북을 꺼내 글을 쓴다. 이렇게 내 마음을 풀어내는 시간, 글쓰기는 한 시간이면 충분한데, 그동안 뭣한다고 글 쓸 시간을 아껴댔는지 모르겠다.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한 시간을 아껴서 뭔가 생산적인 책을 읽고 자료를 찾으려 했지만, 그보다 더 급박하고 중요한 것은 마음을 읽는 시간이다. 한 시간 글을 쓴다고(빨리 쓰면 15분만 써도 그만인데…) 세상이 뒤집히거나 내가 하던 일에 치명타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나에게 야박하게 굴었나 싶다.
디톡스를 하면서 집의 잡동사니를 엄청 내다 버리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더 이상 쓰지 않을 물건이 눈에 띄면 커다란 봉지를 가지고 와서 담아 버린다. 오래되고 안 신는 구두를 한 켤레 발견하면, 가족들 신발을 모조리 뒤져서 안 신을만한 신발은 다 봉지에 넣어서 내다 버리는 식이다. 싱크대에 낡은 쇼핑백 하나라도 눈에 띄면, 그와 비슷한 종류의 쓰지 않는 물건은 싹 다 치운다. 정리의 달인 ‘곤도마리에’의 <정리의 힘>에서 읽었던, 환경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 말에도 동의하지만, 몸이 바뀌면 환경이 바뀌는 것도 사실인가 보다. 몸의 독소를 빼는 디톡스를 하면서, 몸의 살이 빠지고(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노폐물도 빠지고 있을 거다), 생활 습관이 바뀌고 삶의 환경이 바뀌고 있다.
표지 사진: Unsplash의 Vitalii Pavlyshyne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