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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미소리 Nov 08. 2023

파김치로 돌아온 일상

먹고사는 일상

집이 어질러져 있고 치울 기미도 없을 때, 장미꽃 한 송이는 집을 정돈하는데 효과가 있다. 널브러진 식탁 위에 투명한 유리병을 꺼내고 빨간 장미를 한 송이 꽂는 순간,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물건들이 무색하여 치우게 되고, 식탁이 정돈되니 식탁 주변도 치우고 그렇게 한 군데씩 정리하다 보면 정리가 되지 않은 부분이 거슬려서 집을 싹 치우게 되는 경우다.


나는 파김치를 담그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기본적으로 건강한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라 어지간해서는 잔병치레가 없는 편인데 유독 약한 부분이 피부다. 피부도 그럭저럭 괜찮다가 지난여름 내내 피부병으로 심한 병치레를 했다. 다행히 내 몸, 내 집 정도는 건사할만했지만, 가능한 한 일을 벌이지 않고 가장 쉬운 조리법으로 간단한 음식을 주로 해 먹었다.


집안일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지만, 사실 김치를 제대로 담가본 적이 없다. 양가 어머니들이 건강하신 편이니 겨울이면 김장도 나누어 주시고 철철이 계절에 맞는 김치를 해주시는 편이기 때문에 김치를 담그는 것이 간절히 필요하지도 않은 데다가 개인적으로 김치 없이도 밥을 먹는데 불편함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별로 김치를 담글 생각도 하지 않고 지냈다. 다만 집에 김치가 떨어졌을 때에는 손쉬운 부추김치나 무생채 정도를 해서 얼마간 때우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인이 지나는 소리로 파김치를 담갔다고 한 말이 귀에 꽂혔다.


어린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치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좋은 선생님을 붙여 주어도 안되고, 어떤 설명으로도 아이가 수영을 배우지 못하면, 아이의 친한 친구가 곁에서 수영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어린아이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혹은 경쟁심 때문에 쉽게 수영을 배운다(내 아이를 대상으로 실험해 본 경험은 아니고 어디선가 읽었다. 어떤 책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지금껏 수십 년을 파김치 담글 생각조차 없이 살다가 지인이 파김치를 담갔다는 이야기에 구미가 당겼다. 그리고 인터넷을 급히 검색했다. 나왔다. 쉽게 나왔다. 파김치를 담그는 방법은 매우 쉬웠다. 부추김치나 무생채만큼이나 쉬웠다. 멸치액젓과 고춧가루와 물이 주양념인데, 심지어 세 가지가 동량이다. 파 한 다발 기준으로 각각 15 큰술을 넣으면 된다. 거기에 설탕과 다진 마늘이 조금(두 큰 술 정도씩) 추가될 뿐이다. 양념을 그릇에 계량해 두고 파를 씻으면, 파를 씻는 사이에 양념이 서로 어우러진다. 냉동 다진 마늘도 부드럽게 녹고 고춧가루도 다른 양념에 섞여서 충분히 퍼진다. 씻은 파에 (파는 자르거나 말거나 마음대로다, 나는 아이들 먹기 편하게 삼등분으로 잘랐다) 길게 자른 양파를 넣고 양념을 버무리면 끝이다. 그리고 파김치는 익힐 필요도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다. 파 머리가 크다면 파 머리 부분은 멸치 액젓을 살살 묻혀서 반시간 정도 두었다가 무치면 숨이 죽어서 좋다. 그런데 요즘에 나오는 쪽파는 거의 실파처럼 가늘어서 액젓을 미리 묻혀 두지 않아도 잘 버무려진다. 파김치를 한 날, 냉동실에 있던 보쌈용 돼지고기를 삶았다(돼지고기는 월계수 잎만 두세 장 넣고 삶으면 잡내가 없다).



살림을 15년 이상 하면서도 파김치를 처음 담갔고 보기 좋게 성공했다. 아이들 둘이 삶은 돼지고기 한 근에 파김치를 올려서 맛있다며 먹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사기충천해서 일주일 뒤에 다시 파김치를 담갔다. 이번에는 양념을 과하지 않게 삼삼하게 담갔다. 사실 처음 담근 파김치는 양념 계량을 거의 두 배로 한 바람에(내가 산 파의 한 단은 일반 파의 반 단 정도의 양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반질반질 윤도 나고 짜고 매운맛은 일품이었지만, 너무 자극적이었던 터라 두 번째에는 양념을 적당히 넣었다. 파김치는 파 자체가 양념으로 쓰일 만큼 맛이 좋기 때문에 양념이 좀 적든 많든 실패할 일이 거의 없다.


파김치를 성공적으로 하고 나니 작은 아이의 기대가 커졌다. 이번에는 배추김치를 담가 달란다. 진짜 배추 겉절이든 포기김치든 담글 수 있을 것 같다. 커다란 다라이만 있으면 말이다. 오가는 길에 마트에 놓인 배추를 보면 당장 한 묶음 사 올 기세다. 배추를 보면 동시에 다라이를 떠올린다. 다라이를 하나 살까?


처음으로 담근 파김치 한 다발(사실은 반다발 양이다)에 음식을 제대로 한 번 해볼 요량이 든다. 내게 파김치는 널브러진 식탁 위의 장미꽃 한 송이, 수영 잘하는 어린 친구 한 명의 역할을 해 주었다. 지쳤거나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기운을 없을 때에는 딱 한 가지의 일을 벌이는 게 일상의 균형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럴 기운도 없을 때에는 누군가가 가져다준(혹은 마트에서 산) 파김치에 식사를 하고 한잠 푹 자는 게 보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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