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엄격한 자연식물식으로….

by 소미소리

이사를 하고 바빠지니, 오히려 엄격한 자연식물식을 유지하기 쉬워졌다. 집에 사 둔 식재료는 별로 없고, 집 정리하느라 마트까지 갈 에너지도 없고, 이것저것 해 먹을 시간의 여유도 없으니, 그야말로 반강제적으로 제대로 된 자연식물식을 하고 있다. 생채소와 과일, 그리고 익힌 통곡물만 먹고 있다. 이사 전에 냉장고 과일 칸에 가득 채워둔 복숭아와 아오리가 있고, 미리 만들어 둔 양배추양파무침이 넉넉하다. 김은 에어프라이어에 (120도에서) 3분만 구우면 되니 쉽게 준비할 수 있다. 마침 주문한 현미가 와서 쥐눈이콩을 넣고 현미밥을 지었다. 현미밥은 정말 오랜만이다. 현미찹쌀밥은 맛있지만, 찹쌀의 쫀득쫀득한 맛이 빠진 현미는 그저 거칠기만 하다. 2시간 이상 불리고 물을 넉넉히 잡고 밥을 했지만 푸석하고 이물감이 느껴진다. 아무리 도정한 백미보다 통곡물인 현미가 좋다지만 이 맛을 계속 먹을 자신은 없다. 윤기 나는 현미밥을 지을 방법이 필요하다.


아침은 복숭아와 아오리를 준비하고, 점심과 저녁은 그야말로 100프로 잡곡밥, 쥐눈이콩을 올린 현미밥에 김구이와 채소 반찬을 먹었다. 부엌을 어느 정도 정리했지만, 아직 식기류를 새로 씻어 두지는 못했다. 방학중인 작은 아이 반찬으로는 뚝딱 만들 수 있는 계란말이를 했다. 가느다란 파 한 줄기를 송송 자르고, 달걀 세 알을 풀어서 설탕과 간장으로 간을 했다. 다행히 계란말이에 김과 채소 반찬만으로 아이가 점심을 맛있게 먹어 주었다. 아이들 저녁은 생선이나 한 마리 구워 줄까 하던 차에, 아이들이 냉동실에 있던 냉동피자를 발견했다. 다음에 먹자고 미뤄오던 냉동피자를 드디어 구웠다. 집 정리에 에너지를 몰아서 쓰고 나니, 반찬 만들 의욕이 떨어졌다. 집밥을 먹이려고 미뤄오던 피자는 오늘 같은 날 딱 좋다.


집은 서서히 정리가 되고 있는데, 냉장고는 텅텅 비어 가고 있다. 집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엄청나게 내다 버렸다. 3일 동안 내놓은 집안의 물건이 이렇게 많을 줄을 생각도 못했다. 틈날 때마다 물건을 가져다 버리더라도 이사하고 나니 버릴 물건 투성이다. 그러고도 더 버릴 물건을 찾게 된다. 사실 정리는 버리는 거다. 버려야만 공간이 생기고 그래야 정리가 된다. 평소에는 집 정리에 에너지를 쓸 일이 별로 없었다. 늘 손길이 가는 곳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니, 집을 뒤집어엎을 필요도 없었다. 묵은 짐을 치워야 한다는 마음 한 구석의 무거움은 늘 뒤로 미뤄둔 채였다. 드디어 집은 잘 치우고 있는데, 음식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평소에는 자연식물식을 준비하면서 따로 가족들 음식을 챙기는 게 어렵지 않고, 오히려 즐겁더니, 요 며칠은 정말 근근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와중에 다행인 것은 자연식물식만큼은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사 준비와, 말복날의 이사, 그리고 눈에 띄는 묵은 짐을 정리하는 며칠 동안 몸이 혹사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몸을 전혀 챙기지 못하고 잠도 별로 못 자고 여기저기 신경을 썼는데, 자연식물식이라도 유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외부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는 내가 어쩌지 못하더라도 먹는 음식은 내가 조절할 수 있다. 몸에 좋은 음식이 나를 위한 가장 좋은 선물이다. 아토피가 도지기 전에, 나를 위한 소소한 선물은 달콤한 디저트와 향미 좋은 커피였는데, 이제는 엄격한 자연식물식이 내 몸을 위한 선물이다.


* 표지 사진 : Unsplash의 Nature 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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