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 문학상 청소년 부문 대상 수상 작
비스킷은 대체로 형체가 희미하다고 합니다. 존재감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하죠. 프롤로그에서 비스킷을 단계별로 나눈 걸 보면서, 나는 어디에 속한 적이 있는지, 내 아이는 어떠한지 살펴보게 되더라고요. 이 책을 읽은 저녁에, 베테랑 2 영화를 보고 왔어요. 거기에 황정민 아들로 나오는 배우가 생각났습니다. 집에서는 2단계지만, 학교에서는 3단계일 수도 있겠다면서요. 이 책과 영화가 겹쳐 더 혼란스럽기도 했고요.
어릴 때는 어른만 되면 모든 일을 척척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의 세계에는 실패도, 험담도, 왕따도 없을 거고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자아가 형성된 어른들의 세계가 더 끔찍했습니다. 작은 모임에도, 가정에도, 직장에도 김선미 작가가 말하는 비스킷은 있었습니다. 간혹, 비스킷 같은 존재가 되길 자처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저도 직장 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 슬럼프가 올 때면 비스킷이 되고 싶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내가 할 일에만 집중해야지 하고요. 그렇다고 존재감이 없어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할 때가 지금도 더러 있어요.
자존감: 자신의 가치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자신을 존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평가, 주로 내면적이고 안정적인 특성
자신감: 특정 상황이나 과제에 대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
자존감과 자신감은 다릅니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나를 어떻게 대할까요. 제성의 친구 도주는 자존감이 낮은 아이로 보입니다. 제성이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를 존중해 주고 긍정적인 기운을 주면서 나아지길 바란답니다. 어찌 보면 제성이는 정답을 알고 있어요. 비스킷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요. 그리고 그 시작은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도요.
제성이는 층간 소음을 일으키는 윗집 둘째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여학생은 자신을 '조제'라고 소개하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란 영화 속 여주인공 이름과 같죠. 조제는 제성이 윗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동네에 와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제성이의 질문에, 그냥 조용히 앉아 여기에 있는 것만 보고 듣고 느끼고 가라는 말투였습니다. 천국에 왔으니 조용히 천국을 느끼라는 말에서, 불필요한 말과 행동은 굳이 할 필요 없다는 메시지가 보이더라고요.
제성이 아빠와 제성이를 보며 부자의 소통 방식이 아쉬웠습니다. 저도 아들이 두 명입니다. 첫째는 초등학교 5학년이지만 사춘기 신호가 전해집니다. 대화가 뚝뚝 끊기며 건조한 날이 늘어나거든요.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벽 보고 얘기하는 것처럼 일방통행인 경우가 많아요. 혹시 내가 제성이 아빠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조제 여동생한테 말로 한 방 먹힌 거죠. 네 살짜리가 한 말이라는 게 믿기나요? 그 집 엄마와 아빠가 자주 나눈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꼬마에게 제성이는 '약해 빠진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보였나 봐요.
비스킷과 시든 꽃을 떠올려봅니다. 비스킷은 잘 포장된 과자 봉지 안에 있어도 부딪치면 모서리가 쉽게 으스러지죠. 양쪽 가장자리에 약하게 힘만 줘도 중간이 부러집니다. 만들 때는 온갖 재료를 넣어 맛있게 만들었지만, 부서질 땐 쉽게 부서지죠. 깔끔하게 두 동가리 나는 게 아니라, 부스러기도 만들어냅니다. 꽃도 그렇죠. 시들어서 떨어질 때, 꽃잎이 여기저기 흩어지며 떨어집니다. 비스킷이 으스러지지 않도록, 꽃이 싱그러움을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리고 저는 어떤 방식으로 애쓰고 있었을까요?
어른이 되면 알아서 잘 살게 된다고 생각했는데 제성이도 그런가 봅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인생은 꽃길로만 채우기도 하죠.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면 어릴 때처럼 잘 살지 못합니다. 해맑지도 않고, 자주 웃지도 않고, 걸리는 것도 많죠. 혼자 힘으로 척척해나갈 거 같은데 그렇지도 않고요.
제성이는 비스킷을 도와주려고 애쓰면서 정작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어떻게 비스킷을 보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거 같아요. 어른 비스킷은 아는 거죠. 비스킷으로 살아봤고, 비스킷이 되어봤고,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왔으니까요. 제성이를 믿어주지 않는 부모님으로 인한 속상함. 비스킷이 보이지만 정작 자신은 비스킷이 될까 봐 두려웠던 거죠. 비스킷이 되지 않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비스킷을 보면 도와주고, 비스킷에게 나쁜 행동을 하는 이들에겐 자기만의 방식으로 복수했으니까요.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비스킷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주변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다고요. 저는 그럴 수 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조제(이지안), 희원(꼬마), 도주와 효진(제성이 친구) 이처럼 자신을 소외시킨 가정이나 사회집단으로부터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과잉보호를 받는 시대에는 스스로 비스킷이 되려 하는 이들도 있다고 봐요. 요즘은 독립심이 없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도 하고요. 선택이나 결정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그들에게 오는 지나친 관심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비스킷이 되려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성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청각 과민증, 소리 공포증, 소리 강박증이 있죠.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괴롭고 힘들다고 해서 동굴에만 박혀있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비스킷이라는 존재를 구출하기 위해 활용하죠. 어린이집 친구들이 단합해서 비스킷을 구출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애착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에 만난 아이들의 첫 사회 동료라서 그런지 서로 많은 부분을 감싸주고 단합하는 것도 멋졌습니다.
비스킷 책을 읽으며 저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봤습니다. 지금의 저는 어떠한 지도요. 어떤 집단에서는 제성이처럼 행동하지만, 어떤 집단에서는 스스로 비스킷이 되려 하는 제가 보였습니다. 청소년은 아니지만, 어른의 시각으로도 여러 깨달음이 있던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