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TV는 늘 꺼져있다. 아이들도 켤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파자마 파티하러 놀러 오는 아이들도 집에 돌아가 "○○네 집은 TV를 안 본다"라고 말할 정도다.
안 본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아예 끄고 사는 것도 아니다. 꼭 봐야 할 내용이나 사건이 있지 않은 경우, 굳이 네모 상자에 시간과 열정을 쓰지 않을 뿐이다. TV와 영혼의 단짝처럼 함께 보낸 20대 시절, 돌아보니 남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글쓰기 수업을 한 적이 있다. 티 클래스도 하는 나를 보며, 수강생분이 영국 드라마를 추천해 줬다.《다운튼 아비》. 저택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로, 어느 백작 가족의 품위와 하인의 야망이 펼쳐지는 시대상을 반영한 거라 했다. 무엇보다 그들 일상에 늘 함께하는 영국의 차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좋겠다는 말씀도 보탰다.
방영 중인 OTT에 가입하는 돈이 아깝기도 했고, 이만큼 긴 시리즈물을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 번 빠지면 밤샐 게 뻔했다.
최근에 한 기관에서 '술보다 차'를 마시자는 슬로건으로 티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다. 취지가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Teetotal' 운동과 관련 있기에 자료를 찾다, 갑자기 생각났다. 도청장치라도 달렸는지, 방영 중인 OTT 채널 할인 쿠폰이 도착했다. 발가락 골절로 집에만 있는 이번 달이 아니면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신속하게 결제한 후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영국 귀족 서열은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으로 나뉜다. 주인공은 백작 작위를 가지고 있으며, 미국인인 아내와 세 딸이 있다. 다섯 식구가 사는데 하인만 열 명이 넘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일하는 하인들을 보며, 저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뭔가 찾아보게 됐다. 모임, 파티, 바자회 등 나름 분주한 일상을 보낸다. 일하는 귀족은 귀족답지 못하다고 여기고, 스스로 머리카락 한 올도 묶지 못하며, 하루에도 여러 번 갈아입는 옷도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백작이란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이 없으면 먼 친척 중에 조건에 부합하는 남자에게 직위도 저택도 물려주는 게 전통이다. 그 집에서 계속 살려면 백작의 딸과 미래 상속자가 결혼해야 한다. 합법화된 근친상간이라고나 할까.
교과서처럼 한두 줄 간략하게 적힌 글로만 읽었다면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드라마로 그 시절 시대상을 접하니, 글로만 읽던 영국 사회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여성 투표권을 주장하고, 독립을 선언하며 가치관과 욕망이 충돌하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독감을 겪으며 귀족만이 가진 특권 및 계급에 대한 경계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하인들끼리 귀족 험담을 하고, 농부의 자녀가 아닌 이름 있는 가문의 하인으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시대가 변했다, 1920년이다, 많은 게 변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변화는 당연하다, 20세기다, 시대가 바뀔 거다' 등 대사를 듣고 있으면 고작 100년 전 시대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전기가 들어오고, 전화기를 설치하고, 축음기로 음악을 트는 모습까지. 이조차 귀족 집안에서만 가능했다는 사실에도 여러 번 놀랐다.
이 드라마를 보며, TV가 어리석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글보다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이기도 했다. 시대를 이해하고, 영국인을 알아가고, 명대사도 많이 수확했다.
아직 남은 에피소드가 많다. 시대상, 인물, 배경을 이해하고 명대사를 모으며 며칠만 더 깊이 빠져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