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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노래가 소환한 그 시절

by 소믈리연
ChatGPT Image 2025년 9월 12일 오후 09_16_23.png

저녁 무렵, 익숙한 노래 한 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룰라의 ‘3! 4!’였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멜로디가 귓가를 스치자, 마음이 저릿하게 흔들렸다.
창밖으로 어둑해지는 거리에 시선을 두고 있노라니, 1990년대의 어느 날들이 불쑥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놀다 집에 돌아오면 라디오 앞에 앉아 귀를 기울이곤 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유튜브 앱을 열어, 아까 들었던 노래를 검색했다.

친절한 알고리즘은 그 당시 노래를 계속해서 추천했다.

세월을 훌쩍 건너 다시 무대에 선 룰라 멤버의 모습이 화면 속에서 재생됐다.
30년 전과 다름없이 춤추고 노래하는 그들.
그때는 무대 위의 가수들이 힘든지조차 몰랐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늘 반짝이고 멋있게만 보였던 무대.
하지만 작년, 다시 무대에 선 그들은 달랐다.
힘들면 힘든 대로, 고음에서 악이 받치면 받치는 대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면 그대로,
더는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솔직하게 노래했다.
예쁘고 멋진 척 애쓰지 않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 시절, 내 일상에는 음악이 있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브로마이드나 책받침을 모으는 일,
비디오 공테이프를 사서 가요 프로그램을 녹화하고, 친구들과 쉬는 시간마다 돌려보던 시간.
밤 10시가 넘어서야 시작하는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박소현의 FM데이트>, <유영석의 FM인기가요>를 주파수를 바꿔가며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이 나오길 기다렸다.
노래가 시작되면 망설임 없이 녹음 버튼을 눌렀고,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듣곤 했다.
다시 듣지 않더라도, 그 순간을 붙잡고 싶어서 밤늦도록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다.

수요일 밤이면 티브이 앞에 앉아 <가요톱텐>을 봤다.
빈 종이를 꺼내 1위부터 10위까지 곡명을 또박또박 적어나갔다.
5주 연속 1위를 하면 골든컵을 받는 가수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기도 했다.
잡지 뒤편에 실린 가사집을 오려내고, 반 친구들과 쉬는 시간마다 히트곡의 안무를 따라했다.
숙제할 때는 카세트테이프를 뒤집어가며 A면, B면을 번갈아 들으며 공부했다.
정규앨범이 나오면 한 곡 한 곡 가사를 곱씹으며, 첫 곡을 들을 때의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행은 빠르게 변했다.
어제의 스타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얼굴들이 화면을 채웠다.
그때 우리가 사랑했던 이름들도 점점 추억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 한 소절이 들리면,
잠시 멈춰 섰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중학생 시절, 친구와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듣던 밤,
시험공부에 지쳐 창밖을 바라보며 흥얼거리던 가사,
집안 어딘가에 남아 있을 법한 낡은 테이프와 플레이어까지 마음속에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최근에는 예전 가수들이 다시 무대에 서는 모습을 종종 본다.
인이어 마이크를 착용한 채, 팬들과 마주 보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
몇십 년이 흘렀지만 몸이 기억하는 시그니처 안무를 척척 소화하고,
팬들도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호흡을 맞춘다.
시간이 흘러도, 그 노래와 움직임은 우리 모두의 살아 있는 기억이 된다.



나는 1982년생이다.
누군가는 우리를 가장 축복받은 세대라 했다.
전쟁과 가난을 딛고 살아온 부모 세대와, 결핍 없이 자란 MZ세대 사이에서
우리는 오디오와 비디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 위에 있었다.
손끝에 닿던 카세트테이프와, 지금은 손바닥 안에서 모든 음악이 재생되는 스마트폰까지,
그 모든 변화를 함께 경험했다.
적당한 결핍과 넘치는 호기심이 어우러진 시절을 지나왔다.


그 시절 뮤지션들이 전해주던 꿈과 설렘이,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한 곡의 노래가 우리의 과거를 소환하고,
잊었던 마음을 다시 살려낸다.
나는 오늘도 그 시절의 노래를 들으며, 내 안에 남아 있는 시간을 만난다.
누군가는 이런 추억을 오래도록 품고, 또 누군가는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을 한 순간에 떠올린다.
음악이 가진 힘, 그리고 그 힘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고맙다.
그 시절의 노래가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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