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때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만약 계속 열차 승무원으로 일했다면?
만약 결혼하지 않았다면?
내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결국 이렇게 흘러왔을까.
요즘 부쩍 '만약'이라는 단어가 자주 떠오른다.
일어나지 않은 선택의 갈래와 지나온 시간이 겹치면서.
20대의 나는 평범했다.
대학생으로 4년, 싱가포르에서 6개월 남짓 인턴 일하며.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를 오가며
어쩌면 나는 조금 더 큰 세상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KTX 승무원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기차 바퀴처럼 틀 안에 있는 선로 위를 달렸다.
결혼과 함께 두 아이를 품에 안았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퇴사.
둘째가 세 살 되던 해. 다른 일터로 복귀했다.
하지만 10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주부의 삶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아이 교육을 위해 하브루타 공부를 시작했다.
국가 기관에서 주는 자격증이 아닌 민간 자격증.
1년 가까이 배우고, 2년 동안 스터디로 했다.
뭐든 하고 싶었다. 봉사활동이라도.
엄마, 아내라는 이름 말고 나를 설명해 줄 타이틀이 탐났다.
비싼 돈을 지불하더라고 사고 싶을 만큼.
그래야만 내 자아가 완성될 거 같았다.
처음엔 하브루타 스터디를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덤벼들었지만,
임신 중에 태교 기록을
블로그에 소소하게 남겼던 경험,
아이들과 동남아 한 달 살기를
세 차례나 다녀온 경험,
그런 기록들이 나에게 작은 용기를 줬다.
첫 번째 책이 그렇게 나왔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3년 동안 대면 대면했던 스터디 회원과
‘친구 먹기’를 한 뒤,
그 친구는 꾸준히 나를 밀어줬다.
가끔은 긍정의 색을 띤 가스라이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슨 용기였을까, 나도 해보자 싶었다.
코로나 시기,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즈음 '미라클 모닝' 열풍이 불어, 너도나도 자기 계발에 뛰어들었다.
정부 지원금으로 책을 사는 집도 많았고, 아이들 전집 대여업도 성행했다.
단군 이래 자기 계발 시장이 가장 발달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분위기에 나도 휩쓸렸다.
매주 세 번씩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초중고, 대학교, 석사 논문까지 써봤지만
이상하게 글쓰기는 어려웠다.
‘내가 과연 쓸 수 있을까?’
걱정만 하려면 뭐 하러 200만 원이나 투자했나 싶어
계속 수업을 들었다.
공개할 만한 실력이 아니라
블로그에만, 그것도 비공개로 글을 올렸다.
초록 물결이 올라오기 시작하던 봄날,
‘뭐라도 써보자’는 마음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2022년, 첫 번째 개인 저서를 출간했다.
2023년에는 두 번째 개인 저서와
공동 저서 세 권에 참여했다.
이름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작가’라는 타이틀 덕분에 어떻게든 글을 쓰며 살아야겠다는
묘한 책임감이 생겼다.
그래야만 이 직업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얼마 전, 어떤 교수님이 내게 물었다.
"원래 무슨 일 했어요?"
조용히 프로필을 읊었다. 마지막엔, 계속 일했더라면
동기들처럼 높은 직책도 가질 수 있었겠다고 덧붙였다.
“계속 그 일을 했다면,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하고 물으셨다.
아니다. 글 쓰는 삶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만 아니라 책도 읽지 않았겠지.
영어 회화책이나 읽으며 출퇴근길엔 팟캐스트를 들었겠지.
기차 바퀴처럼 정해진 선로만을 달리는 그런 일상.
요즘은 가끔 또 다른 ‘만약’을 떠올린다.
만약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만약 이혼을 했더라면?
만약 또 만약,
내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신기하게도,
글 쓰는 삶과 관련한 ‘만약’ 앞에서는
마음이 잔잔해진다.
복직하지 않은 덕분에,
자기 계발을 하겠다고 공부한 덕분에,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으니까. 이 타이틀이 생겼으니까.
다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언제나 남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선택만큼은 잘했다고,
인정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많은 ‘만약’을 선택하지 않은 대가로 주어진 지금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