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 원래는 좀 부자였죠?

by 소믈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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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리 여기 처음 이사 왔을 땐 좀 부자였죠?"

"아니! 부자였던 적 없는데?"

"엄마 차 팔기 전까지는 좀 괜찮지 않았어요?"

"지금보단 나았겠지."

"우리 이사 가면 한 달에 90만 원씩은 아낄 수 있죠?"

"그렇지."

어제 오후, 둘째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는 차 안. 아이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학원 앞에 내리면서 자기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는 또 왜 물을까. 학원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보며 필름을 되감았다.




사건 1. 굿바이 BMW

지난 10월, 8년간 내 발이 되어준 BMW X6를 팔아치웠다. 연비 좋고, 하차감(下車感)도 쏠쏠했는데. 연식이 쌓이자 여기저기서 골골대기 시작했다. 주행 실력만 카레이서지 정비 지식은 미취학 아동 수준인 나에게, 계기판 속 경고등은 여러 신호를 보내며 위기를 알렸다.

게다가 이 동네로 이사 온 뒤 내 차는 주차장 문지기가 됐다. 남편 업무용 모닝까지 있으니 세 대를 나란히 주차하는 것도 눈치 보였다. 1년을 고민하다 헤이 딜러에 넘겼다. 2,200만 원. 우리 가족의 안전을 책임진 몸값치고 나쁘지 않았다.

남은 건 모닝과 레인지로버. 모닝을 탈 일은 없겠지 했는데 의도적으로 타게 된다. 골목길 운전에도 최적이고, 주차 시 경차 할인도 된다. 열선 시트도 있고, 핸들에 핫팩 기능도 있다. 문제는 어른만큼 긴 팔다리를 가진 아이들이 뒷좌석 시트 위에 다리를 산 모양으로 접어서 앉아야 한다. 장거리 이동 시에는 서로 보조석에 타겠다고 난리다. 엄마가 다시 차를 사겠거니 했는데 그렇지도 않다. 하루 이틀 지나며 강제로 적응하는 눈치다.




사건 2. 이사 Down Grade

우리는 월세 세입자다. 4년 전, 아이들 학군을 위해 멀쩡히 잘 살던 내 집 놔두고, 여기로 왔다. 그것도 부동산 시장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을 때. 지하 아지트와 마당이 딸린 1층 집. 층간 소음 없이 아들 둘을 풀어놓기에도 완벽 그 자체였다.

4년 만에 대구 부동산 판도가 뒤집혔지만 학군 지는 딴딴하다. 오히려 최고점을 찍는다. 우리 집 세입자는 나가겠다는데, 이 집 월세는 요지부동이다. 계산기를 두드렸다. 매달 허공에 260만 원을 뿌리며 살 것인가.

"이사 가자."

가기 싫다는 자와 가자고 우기는 자의 싸움. 3 대 1. 그러나 그 1인이 강력하게 당기는 줄에 다들 끌려왔다. 예산에 맞춰 갈 곳을 찾으니 구축 아파트뿐. 지금보다 두 살이나 더 먹은 집에 간다고 하니, 아이들 반응이 별로다. 이 집에 들어올 때 짓던 그 표정이 아니다.

짐까지 버리면서, 지금 집보다 더 멀어진 곳으로 가는 게 내키지 않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층에 살아본다는 기대를 제외하곤.



사건 3. 아들 '최수르' 자금줄 차단

12월, 집안에서도 긴축 재정을 선포했다. 주 5회 하던 외식을 격주 1회로 삭감. 쿠팡 와우 탈퇴. 오아시스 배송 중단. 식탁은 양가 어머니들이 보내주신 김치와 밑반찬으로 채워졌다. 자발적 스크루지가 된 건, 경제관념이 신생아 수준인 첫째 아들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용돈 5만 원을 쥐여주면 다음날 바로 만수르, 아니 '최수르'로 변한다. 하루에 편의점 두 번은 기본. 4,800원짜리 딸기요거트 스무디에 토핑까지 얹어 마신다. 동생 거까지 두 개를 살 때도 있다. 동생한테 심부름시킨 값으로 (그 돈이면 내가 했을 듯). 돈 좀 아껴 쓰라고 수없이 말했건만. 잔소리 대신, 엄마 아빠가 지갑을 닫는 모습이 더 먹힐 듯했다. 아끼는 것도 모자라, 푼돈 벌 수 있는 방법도 찾았다며 호들갑도 떨었다.

당근 마켓에 팔 수 있는 목록을 작성했다. 거실 테이블, 책장, 전집, 작아진 옷 등. 엄마를 보며 아이는 생각했을 거다. '아, 장난 아니구나!'



"엄마, 우리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좀 부자였죠?"

"그럼, 엄마 차 팔기 전까지는 좀 괜찮았었죠"

"이사하면 이사 비용은 얼마나 들어요?"

사실 이 세 가지 사건의 근원은 전부 내가 시작한 거다. 차를 팔자고 한 것도, 이사를 추진한 것도, 긴축 정책을 선포한 것도.

어찌 보면 해도, 안 해도 그만인 일이었다. 살던 대로 산다고 해서 당장 뭔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매달 조금씩 털리는 통장을 살피지 않은 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굳이 '사건'을 만들어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한 건, 그만한 가치와 뜻이 있어서다.'라고', 스스로 합리화해 본다.

물론 나라고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 타고, 편하게 돈 쓰고 싶다. 그렇지만 지금이라야, 지금이어야만 할 수 있는 결정이란 판단에 기꺼이 감내하고자 '지른'것이다.


이번 3종 사건 세트를 겪으며 아이들도 뭔가 깨달았으면 한다. 파워 T 성향에 단세포 생물인 아들이라, 내가 기대한 양만큼의 깨달음은 없을 수 있다. 오히려 사건으로 만든 나의 적응 여부를 더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미 판은 벌어졌고, 이번 일을 계기로 모두가 단단해질 거라고 믿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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