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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믈리연 Mar 13. 2023

의미 있는 도전, 반장선거

아홉 살, 열한 살 인생에서의 도전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에겐 새로운 것투성이다.

새로운 교실, 선생님, 친구들, 교과서, 학급활동 등 적응할 것들로 분주한 날들을 보낸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의 가슴을 두 근 반 세 근 반 뛰게 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반장선거'.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첫째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목소리도 작아지고 내성적으로 변했다. 반면에 둘째는 여전히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로, 공부 외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진다. 최근에 '피자 선거' 오디오북을 들으며, 자신들은 절대로 반장선거는 나가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았었다.  여기저기서 반장선거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입장에 변화가 생기는 듯했다. 첫째가 몇 년 전에 사둔 <잘못 뽑은 반장> 책을 읽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해로운'이란 별명을 가졌던 주인공 '이로운'이 반장이 되며, 그 역할에 맞게 변화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는지 동생에게 자꾸 이야기했다. 식탁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선거에 나갈 의사가 조금은 있음을 눈치챘다. 둘째는 형이 나가면, 저도 따라가겠다고 선언했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과감히 선언은 했지만, 어떤 공약을 세워야 하는 것인가  머리를 맞댔다.


선거를 앞둔 주말. 알림장을 보았다. 소품이나 응원도구는 제외였다. 오로지 몸 하나로 승부해야 하는데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 건가, 아이들보다 내가 더 설렜다. 공부보단 활발함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며, 이것저것 떠올려보았다. 신발장을 정리하다 머리가 번쩍였다. 세탁해 주고 돌아서면 이내 흙투성이로 바뀌는 운동화. 말 그대로 막 다루고 신다 보니 동생에게 물려주는 건 생각도 못 하는 신발로 이야기를 짜보자 했다.

"애들아, 엄마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반장선거할 때, 이 공약을 말하는 게 어떨까?"

"뭔데요?"

"밑창이 너덜너덜한 이 신발을 갖고 가는 거야. 그리고 당당하게 말해. 큰 목소리로, 짧지만 강렬하게 말이야.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 이 신발 밑창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여러분들의 발이 되어 열심히 심부름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하하하하하, 진짜 웃기다. 근데, 이렇게 말해도 돼요?"

"그럼, 다른 아이디어 있어?"

"아니요. 웃기긴 하는데, 다른 물건은 못 들고 가요. 그러니까 실내화로 바꿔서 말해볼게요."

"그래, 해보자."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 실내화 밑창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여러분들의 발이 되어 열심히 심부름을 하겠습니다!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 여러분들의 발이 되어 이 실내화 밑창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열심히 심부름을 하겠습니다!"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바꿔보며 주말 내내 연습을 거듭했다. 첫째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상황 봐서 나가겠단다. 둘째는 그러거나 말거나 연습에 연습을 더했다. 잠들기 전에도, 눈뜨자마자 식탁에 앉은 채로, 의자가 올라가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연습을 거듭했다. 짝꿍이 자기를 뽑아주기로 했다며, 본인 표 포함하면 두 표는 확보했다며 의기양양했다. 그리고 맞이한 결전의 날. 오늘 아침에 고데기로 머리도 단정하게 하고, 옷도 깔끔하게 입혀주었다. 현관을 나서는 아이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치며,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오후 12시 30분. 교문을 나섰을 둘째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어 전화를 걸었다. 받는 목소리에 힘이 없다. 반장도, 부반장도 모두 떨어졌단다. 자기를 뽑아준다고 했던 짝꿍이 반장이 되고,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남 부반장이 되었다 했다.  씩씩하게 나간 게 어디냐며,  충분히 잘했다고 달래는데도 아이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두 시간 수업을 들어야 하는 바둑학원에서, 한 시간 수업을 마치고 전화가 왔다. 그냥 집에 가면 안 되겠냐고. 형은 영어학원 가고 없는데 괜찮냐 하니, 마저 끝내고 돌아왔다.  시무룩하게 들어오는 둘째의 날씨는 흐렸지만,  의외의 반응을 확인하고 온 첫째의 날씨는 맑았다. 반장선거 출마를 놓고 내적 갈등을 하던 첫째는 반장, 부반장 둘 다 나갔다. 자기를 뽑아줄 친구들이 많지 않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열 곱표를 얻었다며 흡족해했다. 과반수의 표를 얻은 반장을 쿨하게 인정하며, 다음에 나가면 잘할 수 있을 거란 말을 남겼다. 아홉 살, 열한 살 인생 처음으로 나간 선거에서, 아무 감투도 없이 돌아왔지만 스스로가 큰 경험을 한 날이었음은 분명하다. 결과와 상관없이, 오전 내내 조여 오는 심장압박으로 고생했을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삼겹살과 아이스크림, 빼빼로를 사주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선거 시간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푸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언제 이만큼 자랐나 싶었다. 아이들이 경험한 오늘. 충분히 용감했고, 충분히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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