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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믈리연 Aug 10. 2023

다시 제자리

흥분의 짐볼


어제 오후.  넉 달 가까이 쥐고 있던 개인 저서에 마침표를 찍었다.

갯벌에 빠진 장화처럼 질척거리는 것 같기도, 만들다가 멈춘 요리 같기도, 제대로 헹구지 않은 머리카락 같기도 한 찝찝함을 몇 달 동안이나 가지고 다녔다. 매일 목표로 설정한 분량만큼 쓰긴 했지만, 전체 매듭을 짓기 전까지는 그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세 차례의 퇴고를 마지막으로 파일을 전송하는 순간, 운동으로 흘리는 땀과는 또 다른 시원함, 후련함, 개운함이 있었다.

열 달 품은 아이를 낳은 것 같기도 하고,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번지 점프를 한 것 같기도 하고, 대어를 잡은 듯하기도 하고 나만 알듯 말 듯 한 거대한 파도 물결이 밀려왔다.

6호 태풍 카눈 다가오고 있다고 다들 조심하라 하는데, 나가면 안 된다는데 창밖을 보고 있노라니 그게 안된다. 미친 듯 달리고 싶고, 액셀이라도 밟고 싶다.  발길이 닿는 어디든 다니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외치듯 글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말하고 싶다.




학원에서 수업을 마친 첫째가 친구를 데리고 집에 왔다. 어린이집에서부터 시작된 인연이라 그런지 둘만의 애착이 남다르다. 티키타카 하면서 노는  아이들의 기분 좋은 웃음과 에너지가 전해진다.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려 책을 집었는데 집중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오늘은 멘탈케어 실패다.


퇴근길에 남편이 둘째 아이를 데리고 왔다. 학원에서 나오자마자 배고프다고 먹을 걸 찾는다. 첫째 아이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자주 가는 맥줏집으로 이동했다. 아이들이 밥을 안 먹었다고 하니  치킨, 감자튀김 등 추천해 준다. 몇 달 동안 원고를 붙잡고 최선을 다했으니 오늘은 마음 편하게 놀자며 건배를 했다. 저녁 8시. 밖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한다. 천천히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싶은데 순살치킨, 모둠 감자튀김, 눈꽃 치즈 라볶이, 먹태, 파인애플 셔벗 등 메뉴가 나오는 족족 오가는 대화가 멈춘다. 한창 성장기인 아이들이라 잘 먹는 걸 알지만, 이렇게까지 흡입할 줄이야. 웃음이 났다.


'이 정도면 됐어. 4개월의 여정을 끝낸 나에게 드는 축배는 이거면 충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청난 비가 쏟아진다. 누가 위에서 대형 소쿠리로 물을 붓는 것 같다. 어느 때보다 안전을 신경 써야 하는 날임에도, 거센 빗줄기를 보고 있노라니 속이 시원하다. 지금 딱, 내 마음 같다.


집에 도착했다.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글쓰기 수업을 들으러 노트북을 켰다. 첫째가 다가온다.

"엄마, 왜요? 뭐 하려고요?"

"글쓰기 수업 시작했는데, 늦었어. 들어야 할 것 같아."

오늘 같은 날은 쉬어도 되지 않냐며 고개를 가우 뚱하던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옆에 앉아 숙제하고 질문하고 투닥거렸다.

사실은 나도,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그냥 지나갔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맥줏집에서 아이들과 축배를 들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재빨리 흥분의 짐볼 위에서 튕겨 올라와 제자리에 앉았다. 평소 수요일 저녁처럼 수업 들으며 아이들을 챙겼다.




아직 남아있는 여정이 있다. 몇 차례의 투고를 시작으로, 몇 번이나 더 하게 될지 모르는 퇴고, 출간, 그리고 그 후.

적어도 원고이라는 든든한 총알이 있기에 남은 과정 은 당당하게 진행할 수 있으리라. 모든 게 낯설고 겁나고 조심스럽던 첫 번째 출간이 아닌 것도 다행이다. 쫓기듯 달려온 넉 달과는 달리, 남은 일정은 조금 더 여유롭게 맞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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