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노래
우리 집에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4학년, 2학년. 같은 거라곤 성별뿐이다.
첫째는 뒤집기, 기어 다니기, 걸음마를 늦게 떼긴 했지만, 습득력은 남달랐다. 조리원 동기들을 만나, 또래 여자아기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온 날이면, 늦게까지 연습하고 다음 날이면 금세 따라 했다. 말도 그랬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귀가 터진 건지, 두 돌이 지나며 입이 트였다. 색깔, 문자, 글자 인지도 빨랐다. 3세에 알파벳과 색을 구분하고, 5세 때 받침 없는 한글은 며칠 만에 습득해 이내 받침 있는 글자도 익혔다.
둘째 아이는 형이 있어서 그런지 뒤집고, 기고, 걷는 게 빠른 편이었다. 옹알이를 많이 해 말도 빠르겠거니 늦게 터졌다. 늦은 만큼 거대하게 터지긴 했다. 자는 동안을 제외하고는 입이 쉬질 않는다.
한글을 일찍 깨친 첫째를 보며 둘째만큼은 천천히 알려주고 싶었다. 형아처럼 유치원에서 배워오면 어쩔 수 없지만 코로나시대 유치원생이라 문자에 노출될 확률은 낮았다. 전형적인 이과형 성향을 가진 첫째를 보며 둘째는 그림을 많이 보여주고 대화를 나누며 글은 최대한 늦게 알려주고자 하다 보니 아이도 나도 준비가 되질 않았다. 조급함이 없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 조금 더 해맑은 아이로 살길 바랐다.
7세 가을이 되었다. 학습지 선생님이 오셨다. 자음, 모음 하나하나 상세히 알려주신다. 근데 이상하다. 아이의 습득이 늦다. 그때까지도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옷의 상표는 앞에 있고, 뭐든 거울대칭으로 그리긴 했지만 한글 습득에도 난관이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연산 두 권, 한글 한 권의 숙제량도 버겁다. 연산을 한 권으로만 줄였을 뿐인데도 속도가 나가지 않는다. 선생님이 오셔서 형이랑 수업할 동안, 그제야 지난주 과제를 푼다. 종이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리 집만 그런 건가. 놀랍기만 하다.
받침 없는 글자만 뗀 채로 입학했다. 선생님은 괜찮다고 했지만, 사고력 학원 수학 선생님은 걱정된다고 했다. 서술형 문제 지문 파악은 물론이고, 답 적는 게 힘들다고 한다. 옆에 붙들고 가르칠 수도 없고, 한글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쓸 수도 없다. 무엇보다 아이는 답답하지 않다. 사는 게 즐겁다. 한글을 몰라도,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 길이 꽃길이다. 선생님의 칭찬에 하루종일 즐거운 아이. 너를 어쩌면 좋을까. 말하지 않지만 속은 탄다.
2학년 2학기에 접어들었다. 읽기는 되지만 잘 받아쓰지는 못한다.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독서량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도움이 될 만한 독서법과 도서를 추천해 줬다. 차마 내가 하브루타 강사이자 작가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년이면 영어과목도 생긴다. 알파벳을 모르는데 걱정된다.
올해 초에 치앙마이로 여행 갔을 때 일이다. 브런치를 먹는데 사과 주스를 마시고 싶다했다. 저쪽으로 가면 된다며 보냈는데 다시 돌아왔다.
"엄마, 사과주스가 뭐예요? 무슨 색이에요?"
"Apple juice라고 적혀있잖아. 그거 갖고 오면 되는데."
"..."
"아. 미안. 연둣빛 주스 가지고 오면 돼. 그게 사과주스야."
코로 긴 한숨이 몰려왔다. 몇 번이나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어째야 하나.
현관문만 열어도 지천에 깔린 게 영어학원인데. 최강 학군지에 살고 있으면서도 내 아이가 갈만한 학원이 없다. 둘째를 보내려니 상담해 주는 곳을 찾기도 힘들다. 면목없지만 첫째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흔쾌히 받아주셨다. 이사 오기 전의 동네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맨 아래 단계의 반에 보냈다. 한 달이 지나고 이번 달 초. 전화가 왔다. 선생님이다. 기본이 약하다고 하셔서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다고. 우리 아이와 비슷한 아이가 한 명도 있어서, 둘을 위해 같은 시간대에 반을 더 개설하겠다고 했다. 구세주다. 역시, 궁하면 통한다. 그전까지만 해도 가기 싫다고 떼쓰더니 지금은 재미있단다. 그동안 단어시험 대상자에서도 빠져있었는데, 이제는 파닉스와 관련한 단어 열개씩은 치고 온다. 전날 공부하고, 외우고, 제시만 아니면 된다는 소박한 목표도 생겼다.
나도 그랬다. 느렸다. 걸음걸이도 느리고, 생각도 느리고, 적는 것도 느렸다. 맞벌이하는 엄마는, 나를 여러 군데 학원에 보냈다. 다녀오면 저녁 일곱 시였다. 당시, 우리 반에서 가장 많은 학원을 다니면서 가장 공부 못하는 아이가 나였다. 공부가 싫었다. 왜 해야 하는지 몰랐다. 시험은 또 왜 치는 건가. 수, 우, 미, 양, 가로 나오는 성적표에서 숨은 '수' 찾기를 해야 했다. 내가 그랬기에, 둘째 아이의 느림에 재촉할 수가 없다.
엄마가 항상 나에게 했던 말, "너 같은 애 낳아서 키워봐." 현실이 되었다.
입맛, 성격, 취향, 공부재능까지 모두 나를 닮은 아이. 그러기에 재촉할 수 없다.
가사: <고유진-걸음이 느린 아이>
함께 걸으면 손닿지 못할 만큼
한참을 뒤에 오던 그녀였죠
빨리 오라며 그녀를 다그치고
답답한 마음에 난 앞서서 걸었는데
천천히 걸을 걸 그랬죠
먼저 간 날 잃었었는지
그녀가 오질 않네요
하루를 헤매다 돌아온 그녀는
어제보다 많이 다른 모습이죠
날 보며 웃는 미소도
그 향기도 모두 예전과 같은데
낯설은 그대 모습
사소한 일로 많이 다툰 날이었죠
평소와 다른 그녀 모습 보고
먼저 다가가 그녈 달래봤지만
내 말도 들으려 않은 채 울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허락해 줄 수만 있다면
그 사랑 안고 싶다고
고개를 저으면 그저 난 저으면
예전처럼 다시 만날 수 있나요
조금 더 함께 하고파
그렇게도 천천히 걷던 그녀를
알지 못한 내 죄로 보내야 하나요
그대 혼자서 나를 남겨둔 채 가는 건
여린 그대가 참 힘든 일이라
나 그대 따라서 이별이란
슬픈 세상에 나도 함께 갈게요
고개를 저으면 그저 난 저으면
예전처럼 다시 만날 수 있나요
조금 더 함께 하고파
그렇게도 천천히 걷던 그녀를
난 보내야만 하죠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