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노래
8월 23일 처서 이후, 급격히 바람이 차가워지진 않았지만, 피부에 스치는 온도만큼은 달라지고 있다. 하루하루 차갑고 스산하다. 차가운 공기를 반사하려 반소매를 입은 팔뚝과 어깨를 감싼다. 해도 길어졌다. 오전 5시 50분. 운동을 나서면 밝은 햇살이 기다리던 날과 달리 회색빛의 파란 하늘이 점점 짙게 내려앉아 있다.
매년 가을이면 찾아오는 손님은 올해도 제집 드나드는 양 오셨다. 목이 칼칼하고, 침을 삼킬 때마다 왼쪽 인후가 묵직하다. 가끔 귀도 아린다. 한해 한해 정직한 몸은, 건강을 돌보지 않은 반성의 시간마저 준다. 병원에 가보라는 주위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티고 있다. 동네약국에서 사 온 종합 감기약을 비상용으로 둔 채, 냉장고에서 청귤청이 들어있는 병을 꺼낸다. 뚜껑을 열어 슬라이스 다섯 조각과 달콤한 액체를 숟가락으로 퍼내 물컵에 담고 정수기에서 나오는 온수로 채운다. 티스푼으로 몇 번 저으며 싱거운지 체크한 후 식탁에 앉는다. 한 모금 들이켠다. 뜨거운 물과 차디찬 청귤과의 만남은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다. 두 모금 들이켜도 여전히 목이 아프다. 얼른 긴 손수건을 꺼내 목에 둘러 매듭짓는다. 쉴 새 없이 나오는 기침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은 내가 봐도 못났다.
몇 번의 주말만 지나면 춥디추운 겨울이 온다. 찰나의 순간처럼 지나가는 가을을 놓치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산에 가던지, 드라이브를 가던지, 산책이라도 가던지. 올가을에 남긴 사진이 아무것도 없다면 나중에야 얼마나 아쉬울까. 뭐라도 하고 싶은데 계획이 없다. 다음 주 일요일에 있을 남동생의 전통혼례식과 동서의 친정 식구들과 경주 나들이하는 게 전부다. 여행이라고 하기 애매한 게, 경주 방문인 처음인 외국인을 동반한 여행이라 온전히 즐기고 올 수 없다. (동서가 대만 사람입니다.)
10월 둘째 주, 셋째 주 주말을 그렇게 보내고 나면 마지막 주가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봄과 가을은 누가 빨대 꽂고 쏙 빨아먹는 듯 사라지는 것 같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마지막 주에는 지금보다 해는 더 길어지고 바람은 더 차갑고 아릴 텐데. 억지스러운 계획이라도 짜야 하는 건가.
어릴 때는 몰랐다. 어른들이 가을이 오는 소리를 반기면서도 아쉬워하는 이유를.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면서도, 한 해 더 늙는다는 이중적인 신호를 주는 계절이라는 걸. 어릴 적 나에게 봄은 봄이고, 여름은 여름이고, 가을은 가을이고, 겨울은 겨울이었다. 따뜻하고, 덥고, 춥다는 경계만 뚜렷했고, 다음 가을이 있지 않냐며 가볍게만 여겼다. 나이 들어 그런 걸까, 유별스러워지는 걸까. 가을이 온다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없던 계획도 일부러 만들어야 하나, 겨울에 가까운 여행 일정을 앞당겨야 하나, 분위기라도 내보려 옷이라도 한 벌 사야 하나, 괜히 동요된다.
올해 추석 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아이들 방학이 재개된 것 같아 일상이 그립기도 했다. 일주일간의 휴일 끝에 맞이하는 혼자만의 시간. 이 시간을 충분히 만끽한 후, 가을을 준비해도 늦지 않겠지. 떠나지 못하는 대신, 가을과 관련된 노래를 들으며 마음이라도 먼저 떠나보내야겠다.
가사: <이문세-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눈부신 아침 햇살에 비친
그대의 미소가 아름다워요
눈을 감으면 싱그런 바람 가득한
그대의 맑은 숨결이 향기로와요
길을 걸으면 불러보던 그 옛 노래는
아직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네
하늘을 보면 님의 부드런 고운 미소
가득한 저하늘에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호숫가 물결
잔잔한 그대의 슬픈 미소가 아름다워요
눈을 감으면 지나온 날의 그리운
그대의 맑은 사랑이 향기로와요
노래 부르면 떠나온 날의 그 추억이
아직도 내 마음을 슬프게 하네
잊을 수 없는 님의 부드러운 고운 미소
가득한 저 하늘에 가을이 오면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