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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믈리연 Sep 15. 2022

홍차보다 진한 유전의 힘

8살 아들의 가출

추석 전 주, 토요일.

전 날, 할아버지 집에서 잠을 잔 첫째는

다음날 학원으로 바로 갔다.

둘째는 집에 오자마자 놀아달라며 칭얼거렸다.


그 전날 숙취로 인해,

침대에서 곧장 몸을 일으키기가 힘겨웠다.

아이의 칭얼거림과 숙취로 인한 괴로움으로,

이불 끝자락 겨우 부여잡고 새우처럼 웅크린 채로

버티고 있던 중에 파란색 알림이 떴다.


"000의 오전 휴대폰 사용시간은 1시간 45분"

 

순간 숙취가 사라졌다.

벌떡 앉아서, 둘째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너, 오늘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났어?"

"8시요."

"형아는?"

"몰라요, 일어나 보니까 형아가 먼저 일어나 있었어요."

"아침부터 게임했니?"

"..."


순간 화가 났다.   약속이 있던 맞지만,

반드시 갈 필요는 없었다. 학교와 학원 일정에,

주말에는 가족여행으로 인해 오랜만에 할아버지 댁에 가고 싶다 했다. 전날 밤 8시가 지나서 보냈기에,

조금만 놀다 자고 온 게 전부인 줄 알았다.

평소 아침엔 한 번에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녀석이

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게임을 그만큼 하고 온 것인가, 알코올의 기운이 아닌,

시간 계산이 되지 않아 더 어질어질했다.


11시 30분. 오전 수업이 끝난 첫째가 한 발씩 뛰는

총총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의 실루엣이 보이자, 데리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 쪽으로 손짓했다.

사뿐한 걸음으로 다가오던 아이도,

엄마의 어두운 낯빛을 눈치챈 듯 잽싸게 멈췄다.


"너 오늘 몇 시에 일어났어?"

"7시요."

"7시? 너 아침에 잘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7시라요?

혹시, 눈뜨자마자 게임했니?"

"..."


아무 말 없이 집을 향해 걸었다. 분노의 크기만큼이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이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고, 질세라 아이들이 따라붙었다. 현관문이 닫히기도 전에,

두 아이들이 등 뒤에 붙어 들어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는 녀석이, 게임을 하겠다고 그렇게나 일찍 일어난 거야?

할아버지 댁에 안 간 지 오래돼서 보내줬더니,

너 거기 게임하러 간 거니?"

"엄마, 어떻게 아셨어요?"

"엄마폰으로 네가 전화기를 얼마나 사용했는지,

게임을 잠글 수 있다는 거 알지 않니?

그동안 엄마가 네 폰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게임도 제한시간 설정을 하지 않았던 건 네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랬던 거야. 그런데,

엄마 시선을 벗어나자마자 어떻게 이럴 수 있니?

학원에서 나오면서 또 게임 눌렀지? 근데 작동이

안되지? 왜 안될까? 이상하지 않았니?"


총총걸음 인척 했지만, 게임 어플이 실행되지 않아

엄마가 무슨 수를 썼다고 대충 짐작은 한 듯했다.


"이럴 거면 그냥 나가서 둘이 살아. 밖에서

게임이나 실컷 하면서, 너희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첫째는 잘못했다고 울고불고,

둘째는 그런 형 뒤에 숨어 같이 울었다.

동생은 잘 못이 없으니 쫓아내지 말랬다.

정작 동생은 형아 혼자 나가면 외로우니 같이 나가겠다 했다.  화가 치솟았었는데, 아이들의 달구 똥 같은

눈물의 의리가 내 마음속 상황을 뒤집어놓았다.

그러다 이내 첫째가


"그럼 내가 집에 있을게, 너 혼자 나가."

"아니 왜? 나는 형아가 외로울까 봐 같이 나가 준댔는데 왜 갑자기 나만 나가래?"


1초 상간에 형제의 난으로 변했다.

이 상황은 대체 뭔가?


"그냥 우리 둘이 같이 나갈게요."

"그래, 필요한 거 챙겨서 나가!"


방으로 들어간 둘째의 손바닥에 팬티 두 장이 들려있다. 움켜쥘 수 최대치가 팬티 두장이어서인지, 형의 것도 챙기느라 두 장인지 알 수 없다.

고작 팬티 두장이 다냐고 하니 다시 들어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내의 두 장 더 들고 나와 종이백에 넣고

"엄마, 안녕히 계세요." 훌쩍이며  나갔다.

첫째는 둘째를 뒤따라 함께 나갔다.


'나가라 한다고 정말 나가다니! 어쭈!'

 

뭐하는가 싶어서 가만히 보니 계단에 앉았다가,

화단 쪽으로 갔다가, 벤치에 앉았다가 하다 결국 다시 들어왔다.


추석 전날, 남동생의 여자 친구가 오기로 해서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모였다.

화단에 펼친 텐트 안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언니에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아니, 애들이 오전부터 하도 게임을 많이 하고 와서, 내가 집 나가라고 했거든.

근데 둘째가 진짜 집 나가는 거야! 지 형도 잘못했다고 하는데!"


"야, 니도 그랬잖아. 8살 땐가. 엄마가 집 나가라 하니까 까만 비닐봉지에 팬티 두장 넣어서 나갔잖아!"

"헉, 내가 그랬다고?"

"내가 그래서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살살 달래서 집에 들어왔잖아. 딱 너 같구먼."


남편은 텐트 밖을 넘어 도로까지 퍼져나갈 만큼의

웃음보를 터트렸고,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엥?" 이란 말만 되풀이했다.

나도 그랬다니, 실소가 자꾸만 터져 나왔다.

정말 그랬을까? 갑자기 둘째의 행동을 고스란히

이해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나중에 시집가서, 딱 너 같은 애 하나만 낳아서

키워봐라. 그럼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알 꺼라."

우리 엄마가 늘 나한테 하던 말. 정말 나는,

나와 98%의 싱크로율이 있는 아이를 낳았다.

성별만 다를 뿐.


오늘 아침, 진한 홍차인 스리랑카의 우바를 내렸다.

우바 홍차도 진하고 쓰지만,

유전자의 힘이 더 진하고 쓴 듯하다.

까만 비닐만 봐도, 아이들의 팬티만 보아도

둘째와 나의 어린 시절이 겹치며 자꾸만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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