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일기
아빠가 어마어마하게 술이 취해 우리에게 욕을 했다. 식사를 차려 주신 삼촌 가족한테 미안했다. 삼촌이 우버택시를 태워줘서 무사히 호텔에 올 수 있었다. 아빠가 방 번호를 기억 못 했다. 다행히 프런트 누나에게 물어서 방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참 힘든 하루였다.
9살 일기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먹어서 너무 좋았다. 그런데 아빠가 요즘 이상하다.
에센에 도착하자 고맙게도 J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의 집은 시내에서 떨어진 주택가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전원주택이었다.
"야, 집 너무 좋네. 별장 같다."
"저희 집은 아니에요. 아직 세 살고 있어요."
독일 역시 집을 장만하는 일은 힘든 일인 모양이었다.
J의 아내가 만들어준 김치찌개와 계란 전 같은 한국음식이 무척 맛있었다. 안 그래도 한국 음식이 그리웠던 차에 음식 솜씨까지 좋아 정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음식만 먹어야 했는데 기분이 좋은 나머지 손님 접대로 내어준 독일 맥주와 와인을 평소 주량도 생각하지 않고 전부 마셔버린 것이었다. 결국 과음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음 날 정신을 깨어보니 숙소였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J가 술에 취한 나를 우버 택시에 태워 보내주었다고 일우가 전해줬다.
"아빠가 너무 취해 나랑 혁우가 아빠를 데리고 왔어요."
"방은 잘 찾아왔어?"
"기억이 나지 않아 호텔 직원에게 물어봐서 찾아왔어요."
"그래? 영어로 물어본 거야?"
"물론이죠. 호텔 누나가 아빠가 소파에 쓰러져 있는 거 보더니 잘 알려줬어요'
숙소까지 잘 찾아와 준 일우가 대견했다. 하지만, 마냥 칭찬만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술에 취해 잠이 들었구나 싶었는데 주사까지 피운 모양이었다. 내 사전에 주사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추태를 이 이역만리 독일, 그것도 후배의 보금자리에서 부렸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J도 J지만 제수씨에게 너무 미안해할 말이 없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바로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그냥 숙소에 숨어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J가 다시 호텔방으로 찾아왔다.
"형, 집사람이 해장국 끓여놨으니 같이 가요."
"아냐, 오늘은 호텔에서 그냥 쉴랜다. 제수씨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아뇨. 형이 직접 얘기해요. 집사람이 일부러 모시고 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더 이상 거절하기가 힘들어 그의 집으로 향했다. 제수씨와 어린 조카에게 사과를 한 후 정성스레 차려진 식탁에 마지못해 앉았다. 이십 대 이후로 이렇게 몽땅 기억을 잃어버린 적은 처음이었다. 많이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내 쓰린 속을 흝고가는 북엇국물에 이 부끄럽고 초라한 상황도 함께 씻겨 갔으면 싶었다.
긴 여행 동안 곪아왔던 종기가 어제오늘 한꺼번에 터지고 있었다. 다른 이에게는 물론 아이들에게조차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생채기였기에 터져버린 노란 고름은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남은 여행기간 만이라도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리라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부끄러운 날일수록 햇살은 유난히 맑았다.